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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비룡(漢江飛龍) - 에필로그: 강은 흘러 역사가 되고

한강비룡(漢江飛龍) - 에필로그: 강은 흘러 역사가 되고 1979년 10월 26일 새벽,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총성(혹은 무협 대결의 마지막 파열음)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과 함께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는 즉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탱크가 도심의 아스팔트를 굉음과 함께 짓밟았고, 총칼을 든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도시는 삽시간에 공포와 불안으로 얼어붙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져 10.26 사건의 진상 규명에 나섰다. 그들의 수사는 신속하고 철저했으며, 일체의 다른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된 공식 수사 결과는 간결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권력 암투 과정에서 내란 목적으로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궁정동의 밤에 휘몰아쳤던 처절한 무협 활극, '사직의 징표'를 둘러싼 암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두 젊은 영웅의 존재는 역사의 기록 어디에도 남지 않은 채 깊은 어둠 속으로 묻혔다. 다만,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방식이나 핵심 요원들의 일 처리 방식에서 과거 악명 높았던 흑룡단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섬뜩한 소문만이 암암리에 떠돌 뿐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김재규는 군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은 건졌으나, 곧바로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길고 지루한 재판 과정에서 차지철의 월권과 전횡을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주장은 '궁색한 변명'으로 치부되었다. 그가 숨겨진 무공의 고수였다는 사실도, 연회장에서 벌어진 무협 대결의 진실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품었던 복잡한 고뇌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모든 것을 자신이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진술하며, 이선우와 윤채영의 존재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결국 1980년 5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그는 파란만장했던 삶의 마...

한강비룡(漢江飛龍) 제4부(第四部): 운명의 밤

한강비룡(漢江飛龍) 제4부(第四部): 운명의 밤 제1장: 운명의 문턱 폐가의 축축한 하수도 통로를 벗어나 다시 서울의 밤거리로 나왔을 때, 빗줄기는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무거웠다. 이선우와 윤채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복면인이 마지막으로 알려준 궁정동의 특정 주소를 향해 어둠 속을 헤쳐 나아갔다. 주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간간이 지나치는 검은색 관용 차량들과, 높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호화로운 저택들의 불빛만이 이곳이 평범한 동네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눈들이 사방에서 그들을 감시하는 듯한, 숨 막히는 긴장감이 온몸을 옥죄었다. 마침내 약속된 주소 근처, 오래된 은행나무가 버티고 선 인적 드문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코트 대신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취운 선생', 아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며칠간의 고뇌와 피로가 깊게 서려 있었으나, 그 너머에는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강철처럼 서려 있었다. 김재규는 두 사람의 무사한 모습과, 선우가 품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암호 밀서를 확인하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 "무사했군. 시간이 없다. 내 말을 잘 듣게." 그는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밤이... 이 나라의 명운을 가를지도 모르네. 저 담장 너머," 그는 근처의 굳게 닫힌 철문과 높은 담장을 지닌 저택을 가리켰다. 바로 궁정동 안가(安家)였다. "대통령 각하와... 자네 부친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흉, 차지철이 함께 있네." 그는 처음으로 차지철의 이름을 명확히 언급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지철에 대한 깊은 경멸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 오만방자한 자가 각하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국정을...

한강비룡(漢江飛龍) 제3부(第三部): 격랑(激浪)의 중심

한강비룡(漢江飛龍) 제3부(第三部): 격랑(激浪)의 중심 제1장: 북한산 가는 길 밤새 폐가를 적시던 가을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하지만 폐가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축축했다. 깨진 창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여명 아래, 이선우와 윤채영은 밤새 씨름했던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지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루마리 위에 그려진 기호들은 하늘의 별자리 같기도, 땅의 맥락 같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고자(古字)들은 그 의미를 굳게 감춘 채, 두 젊은이의 조급한 마음을 비웃는 듯했다. 선우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일신서림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노 영감의 겁에 질린 얼굴,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왔던 파열음과 비명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노 영감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 밀서의 비밀을 반드시 풀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선우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노 영감이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속삭였던 말들. "...북한산 승가사(僧伽寺)의 오래된 불경(佛經)... 그리고 스위스..." 단편적인 말들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인영.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났던 정체 모를 중년 사내, 취운 선생. 그 역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북한산의 옛 절이라... 그곳의 바람은 여전히 차갑겠군." 선우는 채영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차가운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승가사...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선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뜨더니, 이내 결심한 듯 짧게 대답했다. "가자. 승가사로." 두 사람은 서둘러 하산 준비를 했다. 지난 밤 추격전으로 더러워진 옷 대신, 진수 사형이 챙겨주었던 평범한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선우는 아버지의 검을 등산 배낭 깊숙이 숨기고, 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