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비룡(漢江飛龍) 제3부(第三部): 격랑(激浪)의 중심

한강비룡(漢江飛龍)

제3부(第三部): 격랑(激浪)의 중심

제1장: 북한산 가는 길

밤새 폐가를 적시던 가을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하지만 폐가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축축했다. 깨진 창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여명 아래, 이선우와 윤채영은 밤새 씨름했던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지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루마리 위에 그려진 기호들은 하늘의 별자리 같기도, 땅의 맥락 같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고자(古字)들은 그 의미를 굳게 감춘 채, 두 젊은이의 조급한 마음을 비웃는 듯했다.

선우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일신서림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노 영감의 겁에 질린 얼굴,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왔던 파열음과 비명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노 영감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 밀서의 비밀을 반드시 풀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선우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노 영감이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속삭였던 말들.

"...북한산 승가사(僧伽寺)의 오래된 불경(佛經)... 그리고 스위스..."

단편적인 말들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인영.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났던 정체 모를 중년 사내, 취운 선생. 그 역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북한산의 옛 절이라... 그곳의 바람은 여전히 차갑겠군."

선우는 채영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차가운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승가사...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선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뜨더니, 이내 결심한 듯 짧게 대답했다.

"가자. 승가사로."

두 사람은 서둘러 하산 준비를 했다. 지난 밤 추격전으로 더러워진 옷 대신, 진수 사형이 챙겨주었던 평범한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선우는 아버지의 검을 등산 배낭 깊숙이 숨기고, 암호 밀서는 채영이 방수 처리된 기름종이에 다시 싸서 품 안에 깊숙이 간직했다. 최소한의 비상식량과 물, 그리고 만물상에게 얻은 도구 중 일부를 챙겼다. 그들의 얼굴에는 밤샘과 도주로 인한 피로가 역력했지만, 새로운 단서를 향한 희망과 결의가 그 피로를 압도하고 있었다.

폐가를 나선 두 사람은 이른 새벽의 푸르스름한 어둠을 틈타 산동네를 벗어났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주위를 살피며 미행의 흔적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흑룡단의 추격이 미치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북한산으로 향하는 첫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서울의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향하자, 차창 밖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색 건물들 대신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자락이 보였고, 도시의 탁한 공기를 벗어나자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경은 더욱 날카롭게 곤두섰다.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서도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적의 눈이 번뜩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내린 두 사람은 일반 등산객들 틈에 섞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평일 이른 아침이었지만, 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등산객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정해진 등산로를 따르면서도 인적이 드문 샛길을 이용하며 승가사를 향해 나아갔다. 선우는 청랑사에서 익힌 보법(步法)과 기식조절법을 활용하여 지친 기색 없이 산을 올랐고, 채영은 한 마리 새처럼 가볍게 그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깎아지른 듯한 바위 병풍 아래, 천년 고찰 승가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속세의 번잡함이 완전히 차단된 듯, 깊은 산중에 고요히 자리한 사찰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퇴색된 단청과 기와에는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기상만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 장엄했다.

두 사람은 사찰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경내는 한적했고, 몇몇 노승들이 묵묵히 마당을 쓸거나 불경을 외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선우와 채영은 평범한 참배객처럼 보이는 데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경내로 들어섰다.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특히 불경이 보관되어 있을 법한 장경각(藏經閣)이나 오래된 판전(板殿) 건물의 위치를 눈에 담아두었다. 사찰의 분위기는 평화로웠지만, 두 사람은 이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비밀의 무게와, 어쩌면 이미 뻗쳐 있을지 모를 감시의 눈길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비밀의 실마리가 저 고요한 사찰 어딘가에 숨 쉬고 있을 터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노 영감과 취운 선생이 남긴 희미한 단서를 따라, 그들은 천년 고찰의 침묵 속에서 진실을 찾아 나서야 했다.

제2장: 불경(佛經) 속의 암서(暗書)

승가사의 고요한 경내로 들어선 이선우와 윤채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가을 산사의 정취는 평화로웠으나, 두 사람의 마음은 무겁고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들은 참배객들 틈에 섞여 자연스럽게 대웅전과 다른 전각들을 둘러보는 척하며, 사찰의 구조와 승려들의 동선을 파악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노 영감이 언급한 '오래된 불경'을 찾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암호 해독의 열쇠였다. 두 사람은 학구열 높은 학생으로 위장하여 경내를 거닐던 노승이나 불경을 공부하는 듯한 젊은 승려들에게 말을 걸었다. 선우는 아버지가 사용했을 법한 가명이나 인상착의를 섞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희는 불교 역사, 특히 신라 시대 불교 전래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인데, 혹시 오래된 판본의 불경을 열람할 수 있을지 여쭙니다."

혹은, "수년 전에 키가 크고 호방한 인상의 선비 한 분이 이곳에 머물며 금강경(金剛經) 연구에 몰두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그때의 기록이나 관련 자료가 남아 있는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승려들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귀찮다는 듯 자리를 피했고, 어떤 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한 노승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선우를 빤히 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희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이내 굳게 입을 다물고는 돌아섰다. 사찰 전체에 보이지 않는 침묵의 규율이라도 있는 듯했다.

정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들의 시선은 사찰 한쪽에 자리한, 유난히 오래되고 육중해 보이는 '판전(板殿)' 건물로 향했다. 저곳이 불경과 목판(木板)들을 보관하는 장경각일 터였다.

저녁 예불이 시작되고 경내의 모든 기척이 대웅전으로 향했을 때,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움직여 판전의 낡은 빗장을 풀었다. 다행히 문은 안에서 잠겨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서고는 문을 닫았다.

판전 내부는 마치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 듯, 묵향(墨香)과 먼지 속에서 수백 년 묵은 지혜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서가에는 빛바랜 불경 두루마리와 책자들이 빼곡했고, 한쪽 벽에는 거대한 목판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과 채영이 꺼낸 작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내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선우는 노 영감의 말과 아버지의 성품을 떠올리며, 금강경이나 법화경(法華經)처럼 대중적이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은 경전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판본들을 찾아 나섰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가 구석에 꽂혀 있던 수많은 경전들 속에서, 마침내 선우는 유난히 손때가 많이 묻고 표지가 낡은 금강경 한 권을 발견했다. 조선 중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귀한 판본이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금강경을 꺼내 바닥에 펼쳐놓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선우는 아버지라면 어떤 방식으로 흔적을 남겼을지 상상하며, 채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혹시 모를 암호나 표식을 찾으며 책장을 넘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채영이 갑자기 선우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이것은... 단순한 주석(註釋)이 아니야. 암호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경전의 특정 구절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주석 부분이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해설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특정 글자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어 있거나 불필요하게 강조되어 있었다. 청랑회에서 사용하는 암호 체계와도 달랐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암호임이 틀림없었다. "이것이...?" 선우가 속삭이자 채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바로 두루마리를 해독할 열쇠였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암호를 자세히 기록하려던 순간, 선우의 손가락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금강경의 뒷부분, 거의 마지막 장 근처였다. 페이지 사이에 무언가 끼워져 있었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들었다. 작게 접힌 낡은 한지(韓紙) 조각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지를 펼치자, 그 안에는 익숙한 필체의 글씨가 나타났다. 아버지의 필체였다! 하지만 내용은 다급하고 절박했다.

"차(車)가의 마수(魔手)가 뻗쳐온다. 놈들은 이미 징표의 존재를 눈치챘다. 시간이 없다. 이것을 지켜야 한다. 의(義)는 반드시..."

글씨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그리고 메모지의 한쪽 구석에는... 검붉은 얼룩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피의 흔적이었다.

아버지의 필체... 그리고 이것은... 피?

선우의 온몸이 분노와 슬픔으로 부르르 떨렸다. 눈앞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고사?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증거였다. 아버지는 쫓기고 있었고, 위협받고 있었으며, 결국 그 '차가의 마수'에게 희생당한 것이었다. '차(車)' 씨 성을 가진 그 권력자, 그리고 그의 사냥개 흑룡단! 선우는 아버지의 마지막 흔적이자 유언과도 같은 메모 조각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채영은 말없이 선우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길이 선우의 뜨거운 분노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혀주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 속에도 희미한 연민과 분노가 함께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암호 해독의 단서가 되는 주석 부분을 베끼고, 아버지의 메모는 선우가 소중히 품 안에 넣었다. 이제 모든 진실이 명확해졌다. 아버지의 죽음은 암살이었고, 그 배후에는 차 씨 성의 권력자와 흑룡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것은 '사직의 징표'였다.

무거운 진실과 해독의 열쇠를 손에 넣은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이제는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판전의 육중한 문밖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야간 순찰을 도는 승려들인 듯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판전 안에는 마땅히 숨을 곳도 없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위기에 직면한 것이었다.

제3장: 징표(證票)의 무게

판전(板殿)의 육중한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이선우와 윤채영은 숨을 멈췄다. 두 사람은 거대한 경판(經板) 서가 뒤, 먼지 쌓인 어둠 속으로 그림자처럼 몸을 숨겼다. 문밖의 발소리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빗장이 튼튼한 것을 확인하는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야간 순찰을 돌던 승려들이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잠시 느슨해졌으나, 두 사람은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서둘러 아버지의 혈흔이 묻은 메모 조각과 불경 주석에서 베껴낸 암호 해독의 단서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판전을 빠져나왔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두 사람은 얻어낸 비밀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침묵 속에서 북한산을 내려왔다. 날이 밝기 전에 서울 시내의 은신처로 돌아가야 했다. 오가는 길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혹시 모를 추격을 경계하며 그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대신, 더욱 험하고 외진 산길을 택했다. 숲은 아직 어두웠고, 발밑은 밤새 내린 비로 질척였다. 선우는 청랑검법과 함께 익힌 보법(步法)으로 최대한 소리 없이 움직였고, 채영은 밤눈이라도 밝은 듯 그의 앞에서 길을 이끌었다.

몇 시간의 고된 산행 끝에 마침내 서울 변두리의 폐가 은신처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흙탕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온몸은 탈진 상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신처의 축축한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은 가져온 것들을 조심스럽게 펼쳐놓았다. 기름종이에 싼 암호 밀서 두루마리, 그리고 금강경 주석에서 베껴낸 해독의 열쇠. 이제 남은 것은 이 두 가지를 조합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것뿐이었다. 채영은 희미한 등불을 가져왔고, 선우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화랑심결(花郎心訣)의 호흡법이 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었다.

암호는 복잡하고 교묘했다. 금강경 주석에 숨겨진 것은 단순한 치환 암호표가 아니었다. 특정 구절의 몇 번째 글자, 특정 부수(部首)를 가진 한자들의 순서, 거기에 청랑회 내부에서 구전(口傳)되는 듯한 특정 시구(詩句)나 상징 체계까지 결합된 다중 암호였다.

채영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두뇌와 선우의 직관,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채영이 암호의 구조적 규칙성을 파악하면, 선우는 아버지께서 평소 즐겨 인용하시던 시 구절이나 청랑회에서 배운 상징의 의미를 더듬어 그 규칙에 맞는 열쇠 말을 찾아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부딪혀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마리가 풀리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마침내 첫 번째 문장이 그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웠다.

"서위사(瑞西士) 비밀 금고 계좌 번호..."

"월남(越南) 파병 특수 공작 자금 잔여분..."

"경부(京釜) 고속도로 건설 관련 비자금..."

"일협(日協) 자산 처리 관련 이면 계약..."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낼수록, 그 내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부패의 실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 비리가 아니었다. 국가의 주요 사업과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천문학적인 규모의 검은 돈이 조성되고 은닉된 정황, 그리고 그 자금이 흘러 들어간 곳으로 추정되는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 정보와 접근 암호의 일부까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자금의 흐름 중심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 혹은 암시가 있었다.

"...상기 자금은 차가(車家) 직할 관리 하에 둠."

"...모든 이권은 차(車) 모(某)의 재가를 득할 것."

차가(車家). 차 모(某). 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메모 조각을 다시 꺼내 보았다. '차가(車家)의 마수(魔手)'.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바로 이 거대한 비밀, 정권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추악한 자금줄을 밝히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직의 징표'의 실체였던 것이다! '취운 선생'이 말했던 '민초들의 눈물'이 바로 이 검은 돈 속에 얼룩져 있었다.

선우는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거대한 절망감과 분노로 바뀌었다. 한 개인의 원한을 넘어, 이 땅을 병들게 하는 거대한 악의 실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것은 아버지의 유지만이 아니었다. 이 땅의 짓밟힌 정의와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함께 느껴졌다. 개인적인 복수는 이제 '정의'를 위한 싸움과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채영 역시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해독된 내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차가운 분노와 함께, 앞으로 닥쳐올 폭풍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가 아니었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역모(逆謀)나 다름없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혹은 흑룡단에게 완전히 넘어간다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파국이 닥칠 터였다.

두루마리 위에 적힌 진실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두 젊은이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들은 이제 단순히 쫓기는 자들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비밀을 끌어안은 자들이 되었다. 1979년 10월, 유신 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서울의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 속에는 두려움, 분노,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비장한 각오가 교차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제4장: 옥죄는 그물

밤새 몰아친 비는 새벽녘에 잠시 잦아들었으나, 폐가(廢家) 안의 공기는 여전히 눅눅하고 차가웠다. 깨진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줄기가 바닥에 놓인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비추었다. 해독된 글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독사처럼 꿈틀거리며 두 젊은이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 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검은 돈, 국가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부패의 강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무르는 '차(車) 가'의 거대한 그림자.

두루마리 위에 펼쳐진 진실은 너무나 거대하고 추악하여, 선우와 채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서로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선우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흔적이 담긴 피 묻은 메모 조각과 눈앞의 두루마리가 번갈아 보였다. 슬픔을 넘어선,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에 대한 깊은 환멸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럴 수가... 아버지는... 이런 것과 싸우고 계셨던 거구나."

선우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그는 벌떡 일어나 비좁은 폐가 안을 미친 듯이 서성거렸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안에서 들끓어 올랐다.

"이것을! 이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당장! 신문사든, 양심 있는 정치인이든, 재야인사든! 누구라도 좋으니 이 더러운 진실을 까발려야 해! 내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저들이 얼마나 추악한 자들인지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고!"

그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이 진실을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채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진정해라, 이선우. 지금 흥분해서 뛰쳐나가는 것은 불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이 엄청난 비밀을 손에 쥐고도 숨어만 있으란 말인가? 노 영감님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선우가 격하게 받아쳤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채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깊은 고뇌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담겨 있었다.

"누구에게 알리겠다는 것이지? 지금 서울 바닥에 우리 편이 있기나 한가? 만물상 노인도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정권의 개 노릇을 하는 언론이 이걸 보도할 리 만무하고, 양심 있는 재야인사? 그들 역시 흑룡단의 감시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섣불리 접촉했다가는 우리뿐 아니라 그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뿐이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것은 단순한 증거가 아니다.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다. 잘못 휘둘렀다가는 우리 목숨만 끊어질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우선... 최 장로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연락할 방법은 있나? 지난번 연락책 노인장도 습격을 당하지 않았나! 시간이 없단 말이다!"

선우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채영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폐가 안을 맴돌았다.

그들이 은신처에서 격렬한 논쟁과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바깥세상의 공기는 그들의 불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삼엄해졌다. 일신서림에서 벌어진 소동과 연락책 노인의 실종 이후, 보이지 않는 손이 서울 전체를 옥죄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고, 그들 사이사이로 사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행인들을 훑었다.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허리춤에는 불룩한 무전기나 다른 무엇인가가 감지되었다. 그들은 흑룡단 요원들이었다. 주요 길목마다 예고 없이 불심검문소(檢問所)가 설치되었고, 통행증이나 신분증 확인은 훨씬 까다롭고 집요해졌다. 밤이 되면 통행금지 시간은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고, 뒷골목 순찰은 살벌할 정도로 잦아졌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연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불순분자와 유언비어 유포자를 발본색원하여 엄단하겠다"는 정부의 서슬 퍼런 경고가 흘러나왔다. 신문 사회면에는 '용공(容共) 혐의자 검거', '사회 정화 활동 강화' 따위의 기사가 연일 실렸다. 서울의 공기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고, 사람들의 눈빛에는 이유 모를 불안과 깊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듯,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비축해둔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거리로 나서야 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을 택했지만, 그들이 마주한 서울의 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살벌했다. 종로의 한 시장 골목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설치된 임시 검문소에서 총을 든 군인들까지 동원되어 통행인들을 일일이 검문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경찰 간부 옆에는, 선글라스를 낀 채 매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옷깃에 달린 작은 배지는 그가 청와대 경호실 소속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젠장, 경호실까지 직접 나섰군." 채영이 낮게 읊조렸다. 선우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황급히 몸을 돌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채영은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근처 건물 담벼락에 미리 준비해둔 작은 연막탄을 던졌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이 두 사람은 혼란을 틈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등 뒤로 "거기 서!" 하는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간신히 미행을 따돌리고 은신처로 돌아오는 길, 선우는 명동 뒷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만물상의 가게가 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가게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유리창은 박살 났고, 문짝은 부서져 너덜거렸으며, 안쪽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온갖 물건들이 깨지고 뒤엉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만물상 노인이 아끼던 오래된 괘종시계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고, 그가 정성껏 관리하던 희귀한 고서들도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져 있었다. 그 싸늘하고 폭력적인 풍경은 흑룡단의 무자비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만물상 노인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선우는 길거리 신문 가판대에서 충격적인 기사를 발견했다. 과거 아버지와 교류가 있었고, 현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한 존경받는 원로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새벽에 자택에서 연행되었다는 짧은 단신이었다. 그의 이름 옆에는 흐릿하지만 분명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폐가로 돌아온 선우는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았다. 채영 역시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그물은 점점 더 옥죄어 오고 있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고, 세상은 온통 적으로 가득한 듯했다. 손안의 두루마리는 이제 희망의 불씨가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처럼 느껴졌다.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깨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도시의 밤 풍경을 바라보았다. 깊은 절망감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과연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조차 있을까?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서, '포기'라는 이름의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가 희미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제5장: 청와대의 그림자

며칠이 흘렀다. 폐가 은신처의 축축하고 싸늘한 공기 속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이선우와 윤채영은 해독된 두루마리의 엄청난 내용을 앞에 두고 깊은 무력감에 시달렸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절망만이 곰팡이처럼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듯했다. 서울을 뒤덮은 삼엄한 감시망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선우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포기'라는 어두운 속삭임마저 들려오는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낡은 은신처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피투성이가 된 인영(人影)이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선우와 채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쓰러진 인영은 적이 아니었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 그러나 고통과 피로로 일그러진 표정. 그는 청랑회의 가장 어린 수련생 중 하나인 진명(眞明)이었다!

"진명아! 정신 차려라! 어찌 된 일이냐!" 채영이 달려가 진명을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진명의 옷은 갈가리 찢겨 있었고, 온몸은 깊고 얕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숨결은 가빴고, 눈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진명은 채영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피 섞인 기침과 함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놈들이... 흑룡단 놈들이... 청랑사 코앞까지... 들이닥쳤습니다... 일신서림과... 승가사에서... 사형께서 남기신 흔적을... 역추적한 모양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희미했지만, 그 내용은 두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미... 놈들의 정찰조가 설악산 외곽 경계까지... 접근했습니다. 지금쯤... 본진(本陣)이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찰에서는...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준비하고 계시지만... 상대는 단순한 흑룡단이 아니라... 경호실 직속 부대까지 동원될 거라는... 소문이..."

진명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선우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서... 최 장로님께서는? 다른 분들은 무사하신가?"

진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피에 젖은 작은 천 조각을 꺼내 선우에게 내밀었다. 최 장로가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손수건이었다.

"최 장로님의... 마지막... 명이십니다..."

진명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듯 최 장로의 명을 토해냈다.

"...절대로 돌아오지 마십시오. 두 분은... 청랑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반드시... 반드시 징표를 지키고, 때를 기다려... 대의(大義)를 이루십시오! 크헉!"

말을 마친 진명은 검붉은 피를 토하며 그대로 선우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깊은 자상(刺傷)이 나 있었고, 이미 숨이 멎어가고 있었다.

"진명아! 진명아!" 선우가 절규했지만, 어린 수련생의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채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의 얼음 같던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절망과 분노,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충격으로 격하게 흔들렸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족과 같았던 동료들, 평생을 살아온 고향과도 같은 청랑사.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무참히 짓밟히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 시선 끝에는 설악산의 푸른 봉우리들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선우는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나 때문에... 다 나 때문에! 내가... 내가 서울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일신서림과 승가사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린 진명의 싸늘한 주검과 최 장로의 비정한 명령, 그리고 자신 때문에 위험에 빠진 청랑사 식구들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당장이라도 설악산으로 달려가 그들과 함께 싸우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최 장로의 마지막 명령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희는 마지막 희망이다. 징표를 지키고 대의를 이루어라.' 손안에 쥔 암호 두루마리의 무게가 천근만근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비밀 문서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 그리고 청랑회의 마지막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선우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진명의 눈을 감겨주고, 그의 손에 들려있던 최 장로의 피 묻은 손수건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채영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고 고독해 보였다.

선우는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무슨 말로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강요할 수 있을까. 두 젊은이의 어깨 위에는 이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동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고향으로 달려가 함께 스러질 것인가. 아니면 피눈물을 삼키고 돌아서서, 언젠가 돌아올 복수와 대의의 날을 기약할 것인가.

'청와대의 그림자'는 마침내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삼키려 하고 있었다. 폐가 안에는 차가운 비바람 소리와 함께, 두 젊은이의 깊은 고뇌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운명의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제6장: 갈림길

폐가(廢家) 은신처의 싸늘한 공기 속에는 죽음의 냄새와 절망의 무게가 뒤섞여 감돌았다. 어린 수련생 진명(眞明)의 주검은 임시로 덮어둔 낡은 천 아래 조용히 누워 있었고, 최 장로의 마지막 명령이 담긴 피 묻은 손수건은 선우의 손안에서 구겨진 채 떨리고 있었다. 윤채영은 깨진 창문 앞에 못 박힌 듯 서서, 동이 트기 시작하는 잿빛 서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은 꼿꼿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그녀가 느끼고 있을 깊은 슬픔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우는 핏기 가신 얼굴로 진명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최 장로의 손수건을 다시 펼쳐보았다. 혹시 다른 뜻이 담겨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수건 귀퉁이, 피가 묻지 않은 자리에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한 필체로 몇 글자가 더 수놓아져 있었다.

‘...불가(不可)하거든, 불씨를 꺼트리고 목숨을 보전하라. 생(生) 또한 도(道)니라.’

표면적인 명령 이면에 숨겨진, 최 장로의 마지막 배려이자 선택지였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징표마저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하라는 뜻이었다. 선우는 손수건을 떨어뜨릴 뻔했다.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라?

그때, 창밖을 응시하던 채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이 억눌린 격정이 느껴졌다.

"최 장로님께서도... 길을 열어주셨다. 청랑사는... 어쩌면 이미..."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살아남아 힘을 기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선우는 채영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얼음처럼 차갑고 강인하기만 하던 그녀가, 포기하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현명한 판단? 살아남는 것? 사저! 지금 제정신인가! 진명이는 바로 저기 차갑게 누워있다! 노 영감님도 우리 때문에 돌아가셨을지 모르는데!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또 어떻고! 그분들의 희생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이 고작 목숨을 구걸하며 숨는 것이란 말이냐!"

선우의 목소리는 격한 감정으로 떨렸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는 진명의 주검을 가리키며 절규하듯 외쳤다.

채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 역시 감정을 억누르며 받아쳤다.

"감정만 앞세워서는 모두 죽을 뿐이다! 그것이 그분들이 진정 바라는 바겠는가? 우리가 살아서 훗날 힘을 길러 원수를 갚고 청랑회의 이름을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이 최 장로님께서 진정 바라신 '대의'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훗날? 그 훗날이 언제 온단 말이냐! 그때까지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야 하지? 저 두루마리에 적힌 진실을 보지 못했나! 저 검은 돈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짜내고 있는지 모른단 말인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지? 우리는 고작 두 사람뿐이다! 저들은 청와대까지 등에 업은 거대한 괴물이다! 맞서 싸우는 것은 죽음뿐이야!"

두 사람의 격렬한 논쟁은 폐가의 싸늘한 공기를 더욱 날카롭게 갈랐다. 서로의 눈을 보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신념과 절망을 쏟아냈다. 채영의 냉철한 현실 인식과 선우의 뜨거운 분노와 의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한참의 격론 끝에, 선우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품 안에서 아버지의 피 묻은 메모 조각을 꺼내 바라보았다. '의(義)는 반드시...' 그리고 그는 쓰러진 진명을, 희생된 노 영감을, 마지막으로 채영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격분 대신, 낮고 단단한, 강철 같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포기할 수 없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폐가 전체를 울리는 듯한 힘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노 영감님께서, 그리고 진명이가...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렸는지 잊을 수 없어! 이 징표를 불태우는 것은, 그분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 그래, 중요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숨어서 구차하게 살아남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최 장로님께서 믿으신 '의(義)'일 것이다! 나는... 싸우겠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선우의 눈빛은 더 이상 슬픔이나 분노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죽음마저 불사하겠다는,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히려는 듯한 맹렬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채영은 그런 선우의 모습을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그의 미숙함 속에서, 그의 무모해 보이는 결단 속에서, 그녀는 잊고 있었던 어떤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청랑회가 지키고자 했던 순수한 의기였고, 최 장로가 마지막 희망이라 불렀던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 어쩌면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청랑의 길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마음속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선우의 불꽃에 옮겨붙은 듯, 뜨겁고 결연한 불길이 타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선우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고 차분하지만 강철 같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것이 네가 선택한 길이라면, 나도 함께 가겠다.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을지 모른다. 이왕 검을 잡은 인생, 여기서 도망치지는 않겠다. 그것이 청랑의 길이라면... 기꺼이."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 속에서 같은 결의를 확인했다. 더 이상 논쟁도, 갈등도 없었다. 오직 함께 나아가야 할 험난한 길과,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은 어린 진명의 시신을 은신처 한쪽에 예를 갖춰 수습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작은 돌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 짧지만 진심 어린 묵념을 올렸다.

슬픔을 갈무리하고,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했다. '징표'의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취운 선생'은 과연 믿을 만한 인물인가? 그가 남긴 '뱀의 혀'라는 조언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승가사'에는 또 다른 비밀이 남아 있을까? 당장 모든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 이상 숨어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것.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 정보를 모으고, 때를 만들어야 했다. 어쩌면 '취운 선생'을 다시 찾아보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도 있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 남은 식량을 나누어 먹고, 각자의 무기와 짐을 챙겼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절망과 고뇌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고요하고 강렬한 투지만이 남아 있었다. 서울의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앞날은 예측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제7장: 폭풍전야(暴風前夜)

1979년 10월 25일 밤. 서울 하늘은 먹구름에 가려 별빛 한 점 없었고, 간간이 뿌리는 차가운 가을비는 스산함을 더했다. 허물어져 가는 폐가(廢家) 은신처 안, 희미한 등불 아래 이선우와 윤채영은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해독된 두루마리가 품고 있는 거대한 진실의 무게는 숨 막히는 압박감으로 두 젊은이의 어깨를 짓눌렀다. 지난 며칠간 그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은 채, 어떻게 이 폭풍을 헤쳐나가야 할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도시는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졌고, 그들은 덫 안에 갇힌 신세였다.

"…온다."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채영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얼음 같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선우도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에 섞여, 아주 희미하지만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폐가를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殺氣)는 숨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눈빛 교환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선우는 등 뒤의 검을 고쳐 메었고, 채영은 허리춤의 날렵한 검 손잡이를 확인했다. 폐가의 비좁고 어두운 공간은 이제 생사를 가르는 혈투의 장(場)이 될 터였다.

쾅!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 문짝이 안쪽으로 부서져 날아들었다. 동시에 깨진 창문들 너머로 검은 그림자들이 번개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양복, 짧게 깎은 머리,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 흑룡단(黑龍團)의 정예 요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서슬 퍼런 단검이나 특수 제작된 삼단봉 등이 들려 있었다.

"쥐새끼들을 찾아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특히 저놈이 가진 두루마리를 빼앗아!" 선두에 선 지휘관급 인물이 악귀처럼 소리쳤다.

선우와 채영은 이미 몸을 날린 후였다. 선우는 아버지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劍身)이 등불 빛을 받아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그는 청랑사에서 배운 청랑검법(靑狼劍法)의 기본 초식을 펼치며 정면으로 달려드는 두 명의 요원을 막아섰다. 검과 단검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아직 검세(劍勢)는 서툴렀지만, 그의 눈빛에는 죽음을 각오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채영의 움직임은 선우와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마치 한 줄기 차가운 바람처럼, 혹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연(鳶)처럼 요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검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지극히 빠르고 정확했다. 빙심결(氷心訣)의 냉철함이 실린 그녀의 검 끝은 상대의 빈틈만을 노려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휙휙!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요원들의 팔목이나 어깨에서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그녀는 결코 상대를 죽이려 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전투력을 빼앗아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흑룡단 요원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살수(殺手)들이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고, 동료가 베여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달려들었다. 폐가의 낡은 기둥과 벽은 격투의 충격으로 부서져 내렸고, 먼지와 비명 소리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우와 채영은 서로 등을 맞대고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점차 활동 반경이 좁아지고 체력이 소진되어 갔다.

바로 그때였다!

"크하하하! 이런 잔치에 이 몸이 빠질 수 없지!"

폐가의 부서진 벽을 뚫고, 호랑이 같은 거대한 기운과 함께 한 사내가 광소를 터뜨리며 뛰어들었다! 싸늘한 눈빛, 잔혹한 미소. 백호상단(白虎商團)의 독고 검(獨孤 劍)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날렵한 복면의 사내 두어 명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독고 검! 네놈이 여긴 어쩐 일이냐!" 흑룡단 지휘관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흥, 냄새나는 쥐새끼들을 잡는데, 사냥개가 한 마리뿐이겠는가? 저 애송이가 가진 물건은 내가 가져가겠다!"

독고 검은 대답 대신, 번개 같은 검으로 주변의 흑룡단 요원 둘을 단숨에 베어버리고는 곧장 선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검법은 위압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육중한 바람 소리가 울렸고, 그 검기에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서질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폐가 내부는 세 세력이 뒤엉켜 싸우는 혼돈의 도가니로 변했다. 흑룡단은 주인공들을 제압하면서 동시에 백호상단을 막아야 했고, 독고 검은 오직 선우가 품고 있을 '징표'를 빼앗기 위해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선우와 채영은 이제 양쪽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선우야, 정신 차려!" 채영이 외치며 선우의 등을 노리던 흑룡단 요원의 검을 쳐냈다. 선우 역시 풍운보(風雲步)를 극한까지 펼치며 독고 검의 무자비한 공격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너무나 빠르고 강했다. 선우의 팔과 옆구리에 새로운 상처가 늘어갔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대로... 끝인가...'

선우의 마음속에 절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슉! 푸슉!

갑자기 폐가 바깥에서 여러 개의 연막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골목길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지며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자욱한 연기가 깨진 창문과 문틈으로 스며들어와 순식간에 폐가 내부를 가득 채웠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세 세력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했다.

"뭐, 뭐야!" "어디서 연막이!"

혼란스러운 외침 속에서, 선우는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의 팔을 강하게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귓가에 바람처럼 스치는 다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궁정동으로 가시오! 지금 즉시! 해답이 그곳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선우는 본능적으로 그 힘에 이끌려 움직였고, 채영 역시 거의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을 이끈 것은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이었다. 그는 폐가의 무너진 벽 한쪽,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좁은 구멍을 가리켰다. 그곳은 낡은 하수도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인 듯했다.

선우와 채영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등 뒤에서는 연기 속에서 다시 격렬한 싸움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흑룡단과 백호상단이 서로를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쫓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악취가 진동하는 어둡고 좁은 하수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폐가의 일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축축하고 차가운 어둠 속을 얼마나 헤쳐 나갔을까. 등 뒤에서 들려오던 싸움 소리는 점차 희미해졌고, 마침내 그들은 지상으로 통하는 맨홀 뚜껑 아래에 도착했다. 아직 추격의 공포가 가시지 않았지만, 그들은 일단 최악의 위기는 벗어난 듯했다. 선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채영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차갑고 냉철했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암호 밀서가 굳게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귓가에는 '궁정동'이라는, 알 수 없는 목적지가 맴돌고 있었다. 그곳에 과연 해답이 있을까? 아니면 더 깊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다시 한번 살아남았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제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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