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비룡(漢江飛龍) 서장(序章): 바람의 전조(前兆)

한강비룡(漢江飛龍)

서장(序章): 바람의 전조(前兆)

제1장: 남산(南山)의 비둘기

1979년, 기축년(己丑年)의 봄은 더디게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사직단(社稷壇)의 복사꽃 소식은 아직 멀었으나, 회색빛 도시에도 봄볕은 내려앉아 겨우내 웅크렸던 생명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허나 봄기운이 완연하다지만, 마지막 꽃샘추위의 기세는 여전히 매운 바람을 몰고 와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서울의 심장이라 일컫는 남산(南山), 그 정상 부근 팔각정(八角亭) 난간에 한 청년이 기대서 있었다. 스무 해 남짓 살아온 인생이라지만, 소년이라기엔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깃든 얼굴이었다. 잿빛 잠바 차림은 남루하다 할 수는 없으나,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청년의 이름은 이선우(李善友). 그는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도시, 경성(京城) 이래 육백 년 도읍이라는 서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그의 부친(父親), 이진석(李鎭錫)의 기일(忌日)이었다. 얼굴조차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아있는 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고만 했을 뿐, 그 이상은 함구(緘口)하셨다. 다만 아버지는 의롭고 강직한 분이셨다는 말과 함께, 선우가 그 뜻을 이어 올곧게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선우의 시선이 저 멀리,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남산 타워에 머물렀다. 회색 강철 기둥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저것이 이 시대의 거대한 용(龍)인가. 혹은 인간의 오만함이 빚어낸 바벨탑인가. 선우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거대한 철탑 아래, 개미처럼 작게 움직이는 무수한 자동차와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아득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문득, 발치께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산의 터줏대감인 비둘기 떼가 모이를 찾아 몰려든 것이었다. 녀석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제 세상을 활보하며 먹이를 쪼았다. 선우는 문득 생각했다. 저 미물(微物)들도 저리 자유로이 하늘과 땅을 오가거늘, 사람은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굴레와 억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의 풍경 속에도, 사람들의 얼굴 위로 스치는 어색한 미소 속에도, 선우는 보이지 않는 긴장의 끈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대학 교정의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밤거리의 불빛 아래엔 서슬 퍼런 감시의 눈길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부친의 기일을 맞아 찾은 남산의 봄바람조차 마냥 따스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뉘엿뉘엿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팔각정 주변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선우는 마지막으로 서울의 전경을 가슴에 담았다. 뿌연 매연 너머로 보이는 북악(北岳)과 인왕(仁王)의 능선이 저녁 어스름 속에 희미했다. 저 산맥 어딘가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속삭이던 옛이야기 속의 '의(義)'와 '도(道)'가 아직 숨 쉬고 있을까.

선우는 난간에서 몸을 돌렸다. 집에는 저녁거리를 걱정하며 홀로 기다리실 어머니가 계셨다. 청년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가난의 무게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슬픔과 불길한 예감,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하는 이름 모를 불씨. 그것들이 뒤섞여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저녁 어스름이 남산을 감싸 안자, 비둘기들도 잠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오직 차가운 강철 탑만이 무심하게 서울의 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밤, 남산의 바람 속에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거대한 폭풍의 씨앗이 조용히 숨겨져 있었다.

제2장: 스러진 등불

남산의 찬 바람을 뒤로하고 선우가 당도한 곳은, 휘황한 도심의 불빛이 채 미치지 못하는 산비탈의 달동네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낡고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저녁 드라마 소리, 고단한 하루를 마친 취객의 휘청거리는 노랫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간신히 깨뜨릴 뿐이었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탄(煉炭) 냄새가 선우의 코끝을 스쳤다. 이것이 그가 나고 자란 세상의 냄새였다.

막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 할 때였다. 정적을 깨고 다급한 발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선우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림자 속에서 비틀거리며 뛰쳐나온 것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예사롭지 않은 상황임을 직감한 선우가 숨을 죽인 찰나,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 서넛이 매서운 기세로 노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과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뒷골목의 건달패와는 질적으로 달라 보였다.

"크윽!"

노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사내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그들의 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무엇인가 불룩한 것이 느껴졌다. 위기일발의 순간, 소년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뻗어, 맨 앞서 달려오던 사내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어, 어느 놈이야!"

사내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선우는 넘어진 노인에게 달려갔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노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선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품속에서 작은 목걸이 하나를 꺼내어 선우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이것을... 부디... 청랑(靑狼)의... 아들에게..."

노인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다시 달려든 사내들에게 붙잡혀 거칠게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선우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으나,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선우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금속 목걸이를 쥔 채 망연히 서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늦은 아들을 걱정하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의 핼쑥한 얼굴과 떨리는 손을 보며 어머니는 영문을 물었으나, 선우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그는 몰래 어머니의 눈을 피해 노인이 건네준 목걸이를 옷 속에 감추었다.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목걸이에는, 늑대의 옆모습을 닮은 듯한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그날 밤 깊은 시각, 밤의 정적을 깨고 거친 발길이 허름한 방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문 열어! 시키는 대로 하면 험한 꼴은 안 당할 테니!" 낮에 보았던 검은 양복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더욱 살기등등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선우를 등 뒤로 감추며 문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신데 이 야밤에 행패시오! 우리 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남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그녀는 늘 불안감 속에서 아들을 지켜왔던 것이다.

"노망난 영감이 뭘 넘겼는지 알고 왔다. 순순히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주지." 사내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들의 목표는 목걸이였다.

"그런 거 받은 적 없소! 당장 나가시오!"

"어허, 이 할망구가! 시간을 끌 셈인가? 여봐라, 샅샅이 뒤져!"

사내들이 거칠게 집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내 집에 손대지 마!" 그 순간, 한 사내가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거칠게 밀쳤다. "악!" 어머니는 맥없이 뒤로 넘어지며 문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어머니!"

선우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사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넘어진 어머니를 짓밟고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쓰러졌던 어머니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 사내의 발목을 붙잡았다. "선우야... 도망쳐...!"

"이, 이년이!"

분노한 사내가 발길질을 하려는 순간, 선우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단련되지 않은 소년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사내는 선우를 가볍게 뿌리치고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다. 강한 충격과 함께 선우는 벽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을 때, 코끝을 찌르는 것은 비릿한 피 냄새였다. 사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차가운 방바닥에는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미동도 없이. 선우는 기어가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아직 미약하게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어머니의 숨결은 이미 멎어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선우의 울부짖음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 어두운 방안을 맴돌았다.

눈물이 말라붙은 자리엔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슬픔은 어느새 차가운 분노로 변해 있었다. 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안에는 여전히 싸늘한 금속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희미한 온기와 피 묻은 목걸이. 이것이 오늘 밤, 소년 이선우가 가진 전부였다. 그는 알아야 했다. 아버지는 왜 돌아가셨는지, 이 목걸이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자들은 누구인지.

집 안은 이미 안전하지 않았다. 언제 다시 그들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선우는 어머니의 시신 곁에서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평범한 스무 살 청년의 것이 아니었다. 복수와 진실을 향한, 험난한 길 위에 첫발을 내딛는 외로운 늑대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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