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첫눈> 마른 하늘에서, 예고도 없이,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내려앉는 함박눈은 아니었다. 싸락눈처럼 시작해 차츰 굵어지는, 그런 종류의 눈이었다. 회색빛 도시 위로 하얀 점들이 하나둘씩 내려앉자, 을지로의 익숙한 풍경은 아주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쇄소 안, 소년(민준)은 기름때 묻은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과 잉크 냄새 속에서, 아주 잠시,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작은 창이 열린 기분이었다. 그는 저 눈송이들이 더러운 바닥에 닿기 전에 녹아 없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하얀 세상을 꿈꿨다. 조명 가게 앞, 최 사장은 팔짱을 낀 채 가게 문 앞에 서서 내리는 눈을 맞고 있었다. 눈은 그의 낡은 간판 위에도, 팔리지 않는 조명 기구 위에도 공평하게 쌓여갔다. 그는 문득 수십 년 전, 아버지와 함께 가게 앞 눈을 쓸던 기억을 떠올렸다. 시간은 이렇게 또 흘러 겨울이 왔구나. 그는 희끗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 창가, 아르바이트생(소희)은 뜨거운 커피 잔을 나르다 말고 창밖을 보았다. 하얀 눈이 텅 빈 야외 테이블 위를 조용히 덮고 있었다.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고향 집 마당에도 지금쯤 눈이 쌓이고 있을까. 엄마 생각,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퇴근길이 조금 더 외로워질 것 같았다. 사무실 창가, 권 대리는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창밖을 보았다. 빼곡한 빌딩 숲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수정했던 이력서 생각이 잠시 스쳤다. 저 눈처럼, 새로운 시작은 깨끗하고 막막하겠지. 그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 작업실 안, 금속 공예가(서연)는 창가에 놓인 차가운 쇠붙이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거칠고 투박한 금속 표면 위에서 하얀 눈은 의외의 조화를 이루었다. 어쩌면 저런 것이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