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땅>

금요일 오전, 박 사장은 번쩍이는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앉아 을지로의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낡은 상가 건물들과 허름한 공장들을 그는 무심하게, 혹은 값을 매기는 감정사의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숫자와 가능성만이 가득했다. 평당 가격, 용적률, 예상 임대 수익, 최대 개발 이익…

“저기 저 코너 건물 말이야, 김 부장. 진행 상황 어떻게 되고 있어?”

“아, 예, 사장님. 명도 소송은 거의 마무리 단계고, 다음 달이면 철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 아직도 버티는 노인네 하나 있다며?”

“아… 그 도장 가게 영감 말입니까? 뭐, 거의 포기한 것 같긴 합니다만…”

“거의? 쯧쯧. 김 부장, 일 처리를 그렇게 해서 되겠어? 시간은 돈이야. 다음 달까지 무조건 깔끔하게 비워. 필요하면 용역을 쓰든가.”

박 사장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에게 건물은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자산일 뿐이었고, 그 안에 수십 년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나 기억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더 넓은 땅, 더 높은 건물, 더 많은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돈이야말로 세상의 유일한 가치이자 힘이라고 굳게 믿었다.

차가 잠시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박 사장은 창밖으로 보이는 허름한 상가 건물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건물 관리실 앞에는 서류 뭉치를 든 여자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저 건물도 위치는 나쁘지 않은데… 건물주가 좀 까다롭다는 소문이 있더군.’ 그는 속으로 건물의 가치를 빠르게 계산했다. 언젠가는 저 건물도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투자자 중 한 명이었다. 박 사장은 금세 부드러운 비즈니스용 목소리로 바꾸어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회장님! 별일 없으십니까? 예, 예. 그럼요. 이번 을지로 프로젝트 수익률은 제가 보장합니다. 완전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니까요. 허허허.” 그는 능숙하게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다음 투자 계획까지 슬쩍 흘렸다.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그의 눈은 여전히 창밖의 낡은 건물들을 탐욕스럽게 훑고 있었다. 저 낡고 비효율적인 것들을 모두 밀어버리고, 번쩍이는 새 건물을 올렸을 때의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잠시 후, 그는 새로 짓고 있는 주상복합 건물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안전모를 건네받아 쓰고, 현장 소장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상층부로 올라갔다. 아직 골조만 앙상하게 드러난 공간이었지만, 사방으로 을지로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성냥갑 같은 낡은 건물들,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작은 사람들. 박 사장은 그 풍경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기 펜트하우스에서 보면 전망이 아주 기가 막히겠어. 분양가 최고로 뽑아낼 수 있겠지?”

“그럼요, 사장님. 벌써부터 문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현장 소장의 아부성 발언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먼지처럼 보이는 작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나 소소한 희망 같은 것은 박 사장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배경, 혹은 앞으로 개발해야 할 ‘땅’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는 저 아래 세상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고, 자신의 발아래 둘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값비싼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독한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하늘을 향해 길게 내뿜었다. 도시 전체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강렬한 권력욕과 성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이 도시의 더 많은 땅, 더 높은 건물, 더 많은 돈. 그의 욕망에는 끝이 없었다. 그것이 그를 움직이는 유일한 힘이었고, 그의 삶의 이유였다.

저 멀리, 철거 중인 다른 건물의 잔해 위로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박 사장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낡은 것들의 폐허 위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바로 자신 같은 사람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에게 후회나 공허함 같은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오직 더 큰 성공을 향한 끝없는 갈증만이 그의 심장을 뛰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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