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검은바위의 사냥꾼

 

에피소드 1: 검은바위의 사냥꾼

검은송곳 산맥의 칼바람이 검은바위 마을의 허름한 지붕들을 할퀴고 지나갔다. 해 질 녘의 음울한 그림자가 마을을 삼키려 들 때, 그림자 숲 쪽에서 찢어질 듯한 늑대 울음소리가 파고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창문을 덧닫고, 화롯불을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또 시작이군. 지긋지긋한 그림울프 놈들.

그때, 마을 외곽의 가장 높은 바위 위에 한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 다부진 어깨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투박한 갑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짙은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고, 깊은 녹색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칼릭스였다. 그의 허리춤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전투 도끼가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울프들의 합창을 감상했다.

“크흐흠… 노래 실력들이 영 형편없군. 오늘 밤엔 좀 더 격렬한 곡으로 바꿔줘야겠어.”

칼릭스는 바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살짝 울리는 듯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숲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냥은 그의 일상이자, 따분한 마을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특히 요즘처럼 그림울프 놈들이 설치는 날은 더욱 그랬다. 심심풀이 땅콩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오는 격 아닌가.

숲 어귀에 다다르자,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짐승의 낮은 그르렁거림이 칼릭스의 감각을 자극했다. 대여섯 마리의 그림울프가 덫에 걸린 새끼 사슴을 둘러싸고 있었다. 보통 놈들보다 덩치가 크고 털 색이 유난히 검붉은 놈들이었다. 최근 마을을 괴롭히는 그 무리의 선발대인 모양이었다.

“오호, 파티 중이었나? 초대장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군, 친구들.”

칼릭스가 나뭇가지를 툭, 밟으며 모습을 드러내자 그림울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꽂혔다. 놈들의 눈이 흉흉한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가장 앞장선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놈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래, 그래. 반갑다는 인사치고는 좀 격하군. 하지만 난 예의 바른 놈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지.”

칼릭스는 씨익 웃으며 허리춤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육중한 도끼 머리가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림울프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놀아볼까? 내 도끼가 아주 그냥, 근질근질하다고 아우성이거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릭스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거대한 체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빨랐다. 가장 먼저 달려든 그림울프의 머리 위로 도끼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콰직!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놈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칼릭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하나!”

그는 피범벅이 된 도끼를 가볍게 휘둘러 다음 목표를 향했다. 그림울프들이 사방에서 동시에 덮쳐들었지만, 칼릭스는 마치 춤을 추듯 그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를 방패 삼아 몸을 숨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튀어나와 다른 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둘! 어이쿠, 너무 세게 찼나? 미안, 미안. 힘 조절이 잘 안 돼서.”

칼릭스는 낄낄거리며 도끼를 고쳐 잡았다. 그의 전투는 정교함보다는 본능과 압도적인 힘에 의존했다.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무기로 활용했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걷어차 놈의 눈을 노리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창처럼 휘둘렀다.

세 번째 놈이 그의 등 뒤를 노리고 뛰어들자, 칼릭스는 몸을 날렵하게 돌려 피하는 대신 오히려 등을 내주며 팔꿈치로 놈의 턱을 후려갈겼다. 우드득!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셋! 이놈 봐라, 맷집 한번 약하네. 연습 좀 더 하고 오라고!”

남은 그림울프들은 공포에 질린 듯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 놈은 분노로 몸을 떨었지만, 칼릭스의 살벌한 기세에 눌려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왜 그러나, 친구? 벌써 끝인가? 시시하게 굴지 말고 덤벼보라고. 네놈들 모가지 따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거든.”

칼릭스의 도발에 격분한 우두머리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칼릭스는 피식 웃으며 도끼를 고쳐 쥐었다.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팔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넷! 그래,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도끼날이 우두머리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크아아앙! 고통스러운 비명이 숲을 울렸다. 칼릭스는 도끼를 비틀어 상처를 더욱 헤집으며 낄낄댔다.

“아직 숨이 붙어 있나? 끈질긴 녀석이군. 좋아, 특별히 고통 없이 보내주지.”

그는 도끼를 빼내 그대로 놈의 목을 내리쳤다. 다섯. 피보라가 그의 얼굴을 적셨지만,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은 한 마리는 이미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 뒤였다.

“에잉, 저놈의 겁쟁이. 따라가서 마저 놀아줄까?”

칼릭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귀찮아. 어차피 또 오겠지.” 그는 도끼에 묻은 피를 대충 옷에 닦아내고는 새끼 사슴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칼릭스는 덫을 풀어주고는 엉덩이를 툭 찼다. “어서 꺼져. 다음엔 이런 시시한 놈들한테 잡히지 말고.”

다음 날 아침, 마을 회관은 그림울프 문제로 다시 한번 시끄러웠다. 밤사이 칼릭스가 해치운 시체들을 본 주민들의 공포와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가 가득했다. 장로 테른이 주름진 손으로 지팡이를 바닥에 쿵, 내리찍자 소란이 잦아들었다.

“모두 들었을 것이오. 밤사이 칼릭스가 또다시 그림울프들을 해치웠소. 허나,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오. 놈들의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대담해지고 있소. 어제 나타난 놈들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흉포했네.”

장로의 말에 주민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몇몇 젊은 사냥꾼들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 역시 그림울프에게 동료를 잃거나 부상을 당한 터였다.

“그래서 말이오만… 며칠 뒤면 남쪽에서 상단이 도착할 예정이오. 그들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소? 호위 무사들을 고용한다면….”

“장로님,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회의 내내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하품을 하던 칼릭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회관 안의 모든 시선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외부인들 손까지 빌려야 할 만큼 우리가 약해 빠졌다는 겁니까? 이 검은바위 마을이 언제부터 그렇게 줏대 없는 동네가 됐죠?”

테른 장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칼릭스, 네 용맹함은 마을 모두가 인정한다. 허나 이건 네 혼자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다간….”

“자칫하다간 뭐요? 내가 저 시덥잖은 늑대 새끼들한테 질 것 같습니까?” 칼릭스는 피식 웃으며 테른 장로에게 다가갔다. “아니면, 장로님은 내가 이 마을을 지키는 것보다, 외부인들한테 굽실거리며 돈 몇 푼 쥐여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조롱과 오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민들은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칼릭스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그가 실제로 보여준 결과들이 그들의 입을 막았다.

“걱정 마십시오, 장로님. 그리고 여기 계신 겁쟁이 양반들도 마찬가지고.” 칼릭스는 회관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저 털북숭이 짐승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내 사냥터에서 저렇게 시끄럽게 구는 꼴은 두 눈 뜨고 못 보거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요즘 좀 심심했는데 잘 됐지 뭡니까.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이 생긴 기분이라고요.”

그는 ‘장난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즐거워했다. 정의감이나 마을 수호 따위의 거창한 이유보다는, 순전히 자신의 유희와 자존심 때문에 움직이는 듯한 그의 태도는 테른 장로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장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칼릭스의 눈빛은 ‘내 결정에 토 달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며칠 후, 칼릭스는 실제로 그림울프들의 본거지를 찾아내 한바탕 ‘청소’를 하고 돌아왔다. 그의 몸에는 새로운 흉터가 몇 개 더 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을은 다시 평온을 되찾는 듯했다.

그날 저녁, 칼릭스는 자신이 처음 그림울프를 사냥했던 마을 외곽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잘 닦인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는 검은송곳 산맥 너머, 아득하게 펼쳐진 미지의 땅을 바라보았다. 검은바위 마을은 그에게 너무 좁았다. 아무리 강력한 그림울프라고 해도, 결국 그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더 강한 적, 더 넓은 세상, 더 짜릿한 모험. 그의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그때, 마을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 짐마차 굴러가는 소리,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 칼릭스의 녹색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호오, 손님이 오셨나?”

마을에 도착한 것은 테른 장로가 말했던 마르코의 상단이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상단이었고, 호위 무사들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칼릭스는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상단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마르코라는 자는 기름진 얼굴에 약삭빠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본능적으로 저런 부류의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단 사람들은 마을 회관으로 향했고, 칼릭스는 바위에서 내려와 어슬렁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곧이어 마르코가 테른 장로에게 그림울프 소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칼릭스에게 관심을 보였다.

“당신이 그 그림울프들을 혼자서 처리했다는 용사요?”

마르코는 칼릭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그의 눈에는 경외감보다는 계산적인 빛이 감돌았다.

“용사씩이나. 그냥 심심풀이로 좀 놀아줬을 뿐입니다만.”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마르코는 잠시 칼릭스의 태도를 살피더니,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상단이 철벽 도시로 가는 길인데, 요즘 그쪽 길이 험악해서 말이오. 당신 같은 실력자라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텐데. 물론, 보수는 두둑이 챙겨 드리겠소.”

철벽 도시. 검은바위 마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도시였다. 칼릭스의 심장이 다시 한번 세차게 뛰었다. 그의 시선이 마르코의 번들거리는 얼굴과 그 너머, 자신이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향했다.

그날 밤, 칼릭스는 자신의 오두막 앞에서 도끼를 갈고 있었다. 쇳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상단을 따라나선다는 것은 검은바위 마을을 떠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이미 주체할 수 없는 모험심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그를 유혹하는 것처럼.

“좋아.”

칼릭스는 도끼 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 좁아터진 마을은 이제 질렸어. 내 이름이… 그래, 칼릭스라는 이름이 세상에 얼마나 크게 울려 퍼질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 봐야지.”

그의 녹색 눈이 야망으로 불타올랐다. 이제, 진짜 재미있는 놀이가 시작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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