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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첫눈> 마른 하늘에서, 예고도 없이,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내려앉는 함박눈은 아니었다. 싸락눈처럼 시작해 차츰 굵어지는, 그런 종류의 눈이었다. 회색빛 도시 위로 하얀 점들이 하나둘씩 내려앉자, 을지로의 익숙한 풍경은 아주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쇄소 안, 소년(민준)은 기름때 묻은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과 잉크 냄새 속에서, 아주 잠시,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작은 창이 열린 기분이었다. 그는 저 눈송이들이 더러운 바닥에 닿기 전에 녹아 없어질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하얀 세상을 꿈꿨다. 조명 가게 앞, 최 사장은 팔짱을 낀 채 가게 문 앞에 서서 내리는 눈을 맞고 있었다. 눈은 그의 낡은 간판 위에도, 팔리지 않는 조명 기구 위에도 공평하게 쌓여갔다. 그는 문득 수십 년 전, 아버지와 함께 가게 앞 눈을 쓸던 기억을 떠올렸다. 시간은 이렇게 또 흘러 겨울이 왔구나. 그는 희끗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 창가, 아르바이트생(소희)은 뜨거운 커피 잔을 나르다 말고 창밖을 보았다. 하얀 눈이 텅 빈 야외 테이블 위를 조용히 덮고 있었다.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고향 집 마당에도 지금쯤 눈이 쌓이고 있을까. 엄마 생각,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퇴근길이 조금 더 외로워질 것 같았다. 사무실 창가, 권 대리는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창밖을 보았다. 빼곡한 빌딩 숲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수정했던 이력서 생각이 잠시 스쳤다. 저 눈처럼, 새로운 시작은 깨끗하고 막막하겠지. 그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 작업실 안, 금속 공예가(서연)는 창가에 놓인 차가운 쇠붙이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거칠고 투박한 금속 표면 위에서 하얀 눈은 의외의 조화를 이루었다. 어쩌면 저런 것이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땅>

  <땅> 금요일 오전, 박 사장은 번쩍이는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앉아 을지로의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낡은 상가 건물들과 허름한 공장들을 그는 무심하게, 혹은 값을 매기는 감정사의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숫자와 가능성만이 가득했다. 평당 가격, 용적률, 예상 임대 수익, 최대 개발 이익… “저기 저 코너 건물 말이야, 김 부장. 진행 상황 어떻게 되고 있어?” “아, 예, 사장님. 명도 소송은 거의 마무리 단계고, 다음 달이면 철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 아직도 버티는 노인네 하나 있다며?” “아… 그 도장 가게 영감 말입니까? 뭐, 거의 포기한 것 같긴 합니다만…” “거의? 쯧쯧. 김 부장, 일 처리를 그렇게 해서 되겠어? 시간은 돈이야. 다음 달까지 무조건 깔끔하게 비워. 필요하면 용역을 쓰든가.” 박 사장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에게 건물은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자산일 뿐이었고, 그 안에 수십 년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나 기억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더 넓은 땅, 더 높은 건물, 더 많은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돈이야말로 세상의 유일한 가치이자 힘이라고 굳게 믿었다. 차가 잠시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박 사장은 창밖으로 보이는 허름한 상가 건물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건물 관리실 앞에는 서류 뭉치를 든 여자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저 건물도 위치는 나쁘지 않은데… 건물주가 좀 까다롭다는 소문이 있더군.’ 그는 속으로 건물의 가치를 빠르게 계산했다. 언젠가는 저 건물도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투자자 중 한 명이었다. 박 사장은 금세 부드러운 비즈니스용 목소리로 바꾸어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회장님! 별일 없으십니까? 예, 예. 그럼요. 이번 을지로 프로젝트 수익률은 제가 보장합니다. 완전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니...

<엄마에게>

  <엄마에게> 받는 사람: 사랑하는 엄마 (mom_angel@...) 보내는 사람: 김소희 (your_pretty_sohee@...) 제목: 엄마, 잘 지내시죠? 저 소희예요. 사랑하는 엄마께 엄마, 잘 지내시죠? 아빠도 별일 없으시고요? 통 전화를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해요. 가게 마감하고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서 그냥 쓰러져 자기 바쁘네요.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지난번에 보내주신 김치랑 밑반찬도 거의 다 먹었어요. 역시 엄마 손맛이 최고예요. 여기서 사 먹는 건 영 맛이 없어요. 제가 일하는 가게는 여전히 바빠요. 을지로라는 동네가 좀 신기한 곳이라 그런지, 주말에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오래된 공장 골목 사이에 예쁜 카페나 술집이 숨어 있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걸 ‘힙’하다고 찾아오나 봐요. 저도 처음엔 신기하고 재밌었는데… 뭐, 이젠 그냥 다 일이죠. 허허. 아, 얼마 전에는 가게 근처 건물에서 밤에 불이 조금 났었어요! 다행히 금방 꺼져서 큰일은 없었지만, 한밤중에 사이렌 소리 울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여기는 참 별일이 다 있는 동네 같아요. 또 어떤 날은, 아침에 출근하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길에서 뭘 열심히 줍고 계시더라고요. 고물 같은 거였는데… 그냥 좀 짠했어요. 다들 사연 하나씩은 안고 살아가는 거겠죠. 엄마, 사실은요… 요즘 조금 힘들어요. 일이 힘든 건 괜찮은데, 그냥… 좀 외롭기도 하고,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요. 서울 오면 뭔가 번쩍이는 기회도 많고, 하고 싶었던 디자인 공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냥 매일 똑같이 알바하고 월세 걱정하는 거네요. 가끔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면 좀 괜찮아지긴 하는데, 돌아서면 또 혼자니까. 밤에 창밖을 보면 불빛은 참 많은데, 그중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이랑 된장찌개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져요. 시골집 마루에 앉아서 같이 TV 보던 저녁도...

<마감 후>

  <마감 후> 등장인물: 선배: 20대 중반 여성. 이곳에서 일한 지 좀 되었다. 다소 지쳐 보이고 냉소적이다. (어쩌면 <얼룩>의 소희일 수도 있다.) 후배: 20대 초반 여성.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은 희망 혹은 순진함이 남아 있다. 시간: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장소: 을지로 골목 안, 이제 막 영업을 마친 바(Bar) 혹은 카페 내부. (텅 빈 가게 안. 테이블 위에는 빈 잔과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 선배는 바닥을 쓸고 있고, 후배는 컵을 닦고 있다. 설거지하는 물소리, 빗자루질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후배: (컵을 닦으며) 아, 진짜 오늘 진상 손님 대박이었어요. 그렇죠, 언니? 선배: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고) 늘 있는 일이잖아. 새삼스럽게. 후배: 아니, 그래도 자기가 뭘 주문했는지도 기억 못 하고 계속 딴 거 달라고 우기는데… 진짜 어이가 없어서. 선배: 그러려니 해. 술 들어가면 다들 제정신 아니니까. 후배: 하긴… 그래도 너무 피곤해요. 발목 나갈 것 같아요. 선배: (피식 웃으며) 그건 일주일만 더 해봐. 발목이 아니라 영혼이 나갈 테니. 후배: 에이, 언니도 참. (잠시 침묵. 설거지 소리만 들린다.) 후배: 근데 언니, 아까 그… 사진 엄청 찍던 남자 손님 있잖아요. 거의 뭐 작품 사진 찍는 줄. 선배: 아, 그 비니 쓴 남자? 맨날 와서 저래. 인스타에 올리려고 그러는 거겠지. ‘#을지로갬성’ 뭐 이런 거 달아서. 후배: 푸흐흐. 그래도 신기하지 않아요? 이런 낡은 골목에 뭐가 좋다고 이렇게들 찾아오는지. 선배: 글쎄. 자기들이 뭔가 특별한 걸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남들은 모르는 자기만의 아지트 뭐 그런 거. 근데 사실은 다 똑같은 프랜차이즈 커피 마시고, 똑같은 음악 듣고, 똑같은 사진 찍어서 자랑하는 건데. 후배: … 그렇게 말하니까 좀 그렇네요. 선배: (바닥 쓸기를 마치고 쓰레받기를 들며) 뭐가? 후배: 아니… 그냥… 저도 처음 여기 와서 일할 ...

<손길>

  <손길> 늦은 밤, ‘대성 정밀’의 형광등 불빛 아래, 심 기사는 작업대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낡은 선반(旋盤, Lathe) 기계가 낮은 소음으로 예열되고 있었다. 오늘 그의 과제는 오래된 단골 거래처에서 특별히 주문한, 아주 작은 금속 부품 하나를 깎아내는 일이었다. 도면은 이미 머릿속에 완벽하게 들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손과 기계, 그리고 쇠붙이 사이의 오랜 대화뿐이었다. 그는 먼저 두툼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놀랍도록 섬세한 손길로 금속 봉을 기계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기계의 미세한 진동이 작업대를 통해 그의 몸으로 전해져 왔다. 오랜 친구처럼 익숙한 떨림이었다. 첫 번째 공정은 외경(外徑)을 맞추는 일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핸들을 돌려 절삭 공구를 금속 봉 표면에 밀착시켰다. 치이익-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가늘고 반짝이는 쇳밥이 얇은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는 뜨겁게 달궈진 쇠 냄새와 절삭유의 독특한 향이 퍼져나갔다. 그의 눈은 오직 공구의 날 끝과 회전하는 금속 표면이 맞닿는 그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금이나 측정기에 의존하기보다, 그는 소리와 진동, 그리고 손끝의 감각으로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며 핸들을 조작했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그의 몸은 기계와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0.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작업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외경 가공이 끝나자, 그는 잠시 기계를 멈추고 가공된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매끄럽지만 차가운 감촉. 그는 루페(확대경)를 꺼내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흠집 하나까지도 그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만족스러운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음 공정을 위해 다른 절삭 공구로 교체했다. 이번에는 내경(內徑)을 파내고 홈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는 더...

<사이렌>

  <사이렌> 1. 심 기사 (3층 대성 정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작업대 옆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던 심 기사는 매캐한 냄새와 희미한 소란에 눈을 떴다. 복도 쪽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치는 것 같기도 했다. ‘뭔 일이여?’ 그는 부스스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뿌연 연기가 밤공기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래층에서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평생을 바친 이 공장, 저 낡은 기계들. 불이라도 나면… 그는 황급히 작업복을 꿰어 입고 문 쪽으로 향했다. 제발,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아래층 그 시끄러운 술집 놈들이 또 뭔 사고를 친 건 아닌가 몰라. 불안감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었다. 2. 김시우 (1층 바 ‘그루브 을지로’ 사장)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혼자 남아 마감 정리를 하던 김시우는 창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그는 황급히 가게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바로 옆 건물 입구 쪽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두어 사람이 당황한 듯 서성이고 있었다. ‘젠장, 하필 오늘.’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가게에 불똥이라도 튀면 큰일이었다. 비싼 오디오 장비며 희귀 LP 판들. 그는 일단 가게 안의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야 할지, 아니면 나가서 상황을 봐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좁은 골목 안으로 곧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그의 세련된 가게 내부를 어지럽게 비추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3. 린 (인근 공장 베트남 노동자) 야간 작업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어 숙소로 돌아가던 린은 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와 소란에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한쪽 골목 입구로 몰려 있었고, 희뿌연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다급한 한국말은 그에게 소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 사고? 혹시 위험한 건 아닐까? 타...

<흐르는 생각>

  <흐르는 생각> 햇살이… 따갑네. 아직 봄인데 여름 볕 같아. 썬크림을 발랐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어제 일도 깜빡깜빡하는데 뭘. 저기 저 카페, 원래 저 자리가 뭐였더라… 아, 김 씨 빵집. 팥빵이 참 맛있었지. 우리 손주 녀석이 어릴 때 저 집 팥빵만 찾았는데. 그 녀석도 이젠 다 커서 제 앞가림한다고 바쁘고. 빵집 김 씨는 어디로 갔을까. 죽었나? 하긴, 나도 이제 갈 날이 머지않았는데. (빵 냄새 대신 커피 냄새. 씁쓸한 냄새. 젊은 애들은 저런 걸 왜 마시는지. 시끄러운 음악 소리. 쿵짝쿵짝. 귀청 떨어지겠네.) 길 건너 저 영감, 오늘도 저러고 있네. 쯧쯧.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맨날 쓰레기통만 뒤지고 다니는지. 팔자도 기구하지. 그래도 저렇게라도 살아있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살아있다는 거, 별거 있나. 숨 쉬고, 밥 먹고, 가끔 이렇게 햇볕 쬐고… (자동차 경적 소리. 빵! 아이고, 놀래라.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이러다 큰일 나.) 여기는 그래도 좀 조용하네. 철공소 골목. 쇠 깎는 소리, 망치 두드리는 소리. 정겹지. 우리 영감도 저런 소리 속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무뚝뚝해도 손은 참 야무졌지. 저녁이면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들어와서는… 에휴, 먼저 간 사람이 속 편해. 남은 사람만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기름 냄새. 쇠 냄새. 익숙한 냄새. 눈앞이 잠깐 뿌옇네. 기운이 없나.) 저기 저 애들은 또 무슨 말을 저리 시끄럽게 하나. 우리나라 말 같지도 않은데. 베트남? 필리핀? 하긴 뭐, 요즘은 어딜 가나 외국 사람들이 많으니.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세상 참 많이 변했어. 저 아이들도 돈 벌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이 많겠지. 집 생각도 날 테고. 부모님 보고 싶을 테고. (갑자기 매캐한 냄새. 용접하는 냄새인가. 콜록콜록.) 어머, 저기 저 불빛. 번쩍번쩍. 예쁘네. 최 씨네 가게 불빛인가? 아니지, 최 씨 가게는 저쪽인데. 요즘은 저런 희한한 불빛들이 많아. 정신 사납게. 우리 영감이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쓸데...

<현장 방문>

  <현장 방문> 오후 2시,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구청 문화산업과 소속이라는 김 주무관이 강서연의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서연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약간은 닳아 보이는 깨끗한 공무원 복장에 서류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서연 작가님. 김민수 주무관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을지로 영 아티스트 지원 사업’ 관련 현장 실사 차 방문했습니다.” 김 주무관은 악수를 청하며 환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스튜디오 내부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서연은 멋쩍게 웃으며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스튜디오는 깔끔했지만, 작업 중이던 금속 조각들과 공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어수선한 구석도 있었다. “아이고, 작가님 스튜디오가 아주… 창의적인 분위기네요. 허허.” 김 주무관은 서류 가방에서 체크리스트처럼 보이는 종이를 꺼내 들었다. “자, 그럼 몇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우선, 이 공간이 예술 창작 활동 목적으로 정식 임대 계약된 것이 맞으시죠? 사업자 등록은 되어 있으시고요?” “네, 네. 다 되어 있어요.” 서연은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김 주무관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에 걸린 서연의 금속 설치 작품(그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실험적으로 만든)을 가리켰다. “이 작품이 대표작이신가 보군요. 음… 소재가 독특합니다. 혹시 ‘업사이클링 아트’인가요? 요즘 폐자원을 활용한 예술이 ESG 경영과 맞물려 아주 유망합니다.” “아… 그건 그냥 철판인데요. 폐자원은 아니고요.” “아, 그렇습니까? 허허. 그럼 이 작품의 주제는… 혹시 ‘도시 재생’ 뭐 이런 건가요? 을지로의 역사성을 담은…” “그… 도시의 소외와 개인의 불안감을 표현한 건데요.” 서연은 우물쭈물 설명했지만, 김 주무관은 이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 듯했다. “작가님의 주요 수입원은 작품 판매이신가요? 아니면 클래스 운영이나… 혹시 온라인 판매 플랫폼도 활용하고 계신지? 요즘은 스마트 스토어가…” “주로 커미션 작업이나… 가끔 갤러리 통해서 판매...

<빛나는 고철>

  <빛나는 고철> 새벽 두 시. 밤새 내린 비는 그쳤지만, 공기는 여전히 축축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다. 좁은 골목 안, 인쇄소와 철공소들이 깊은 잠에 빠진 시간. 인기척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오직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보안등 하나만이 낮은 소음으로 울고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여자는 지름길인 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늘 무심코 지나치던 길이었다. 낮 동안에는 온갖 기계 부품과 폐자재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던 곳. 그런데 오늘 밤은 달랐다. 깜빡, 깜빡. 고장 난 보안등 불빛이 비출 때마다, 버려진 고철 더미가 기이한 생명력을 얻었다. 비에 젖은 금속 표면 위로 기름이 무지갯빛으로 번들거렸고, 날카롭게 잘린 단면들은 순간순간 섬광처럼 빛났다. 녹슨 철판은 깊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동물의 검붉은 가죽처럼 보였고, 구부러진 파이프들은 잠든 기계 짐승의 뼈대처럼 뒤엉켜 있었다.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 깜빡, 깜빡. 빛이 닿을 때마다 고철 더미는 전혀 다른 형상으로 변했다. 어떤 각도에서는 기괴한 조각 작품 같았고, 어떤 각도에서는 신비로운 외계 식물 군락 같기도 했다. 낡고 버려진 것들이 만들어내는 우연하고도 완벽한 조형미. 축축한 공기 속에서 쇠 비린내와 먼지 냄새가 이상하게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깜빡… 뚝. 갑자기 보안등이 완전히 꺼졌다. 모든 것은 다시 평범한 고철 더미로, 어둠 속의 쓰레기로 돌아갔다. 여자는 잠시 그 자리에 더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는 다시, 젖은 골목길을 걸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걸음 소리만이 잠시 울리다, 이내 깊은 정적 속에 묻혔다.

<이력서>

  <이력서> 몇 주 전, 을지로의 그 번잡한 술집에서 있었던 회식 이후, 권 대리의 일상은 겉보기에는 똑같이 흘러갔다. 그는 여전히 아침이면 지옥철에 몸을 실었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커피를 내렸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끝없이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는 무언가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무심히 넘겼을 부장의 아재 개그나 김 차장의 과장된 제스처가 이제는 기묘하게 공허하게 느껴졌다. 동료들의 얼굴 위로, 그날 밤 술에 취해 붉어졌던, 어딘가 필사적이면서도 지쳐 보이던 그 표정들이 겹쳐 보일 때가 있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가 맡은 역할에 충실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막이 내리고 분장을 지우면 결국 똑같이 지친 얼굴들만 남아있을 것 같은. 오후의 팀 회의는 지루함의 절정이었다. 박 부장은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대부분은 지난 회의 때 했던 말의 반복이거나 핵심 없는 이야기였다. 권 대리는 보고서에 오탈자라도 찾는 심정으로 부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저 열정적인 말투와 자신감은 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문득, 회식 자리에서 ‘열정’과 ‘헌신’을 외치던 부장의 취한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회의가 끝나자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 그는 답답한 마음에 잠시 사무실을 나와 을지로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찬 기운이 남은 초봄의 공기가 그나마 머리를 식혀주었다. 낡은 공구상들 사이로 새로 생긴 듯한 카페의 통유리창 안에는 세련된 차림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몇 주 전 회식을 했던 그 식당 근처를 지나치며, 그날 밤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떠올렸다. 부품처럼 느껴졌던 동료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그 막막함.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질문은 계속 맴돌았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그는 옆 부서의 입사 동기와 마주쳤다. 동...

<섬들>

  <섬들> 일요일 오후, 린은 공장 옆에 딸린 좁은 숙소 방바닥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회색빛 공장 건물과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벽에는 빛바랜 가족사진이 붙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 그는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셨다. 일주일에 단 하루, 이 일요일 오후만이 온전히 그의 시간이었다. 그는 며칠 전 시장에서 사 온 베트남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가장 깨끗한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청계천 변 공원에 도착하자,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린처럼 인근 공장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베트남 동료들이었다. “린! 여기야!” 먼저 와 있던 친구 후안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반갑게 서로의 어깨를 치고, 각자 가져온 간식거리를 펼쳐놓았다. 삶은 땅콩, 딱딱한 바게트 빵, 누군가가 집에서 만들어 온 스프링롤 몇 개. 그들은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아 모처럼 베트남어로 실컷 웃고 떠들었다. 고향 소식, 새로 나온 베트ナム 노래 이야기,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고된 일과 사장에 대한 불평들. 말은 거칠었지만,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그 시간은 위안이 되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공원 주변으로는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한국 사람들이 지나갔다. 어떤 이들은 신기한 듯 흘깃 쳐다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무심하게 지나쳤다. 조금 전에는 비싼 카메라를 든 젊은 남자가 그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찍기도 했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린은 그런 시선에 익숙해지려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자신들이 이 도시의 이국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장식품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린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청계천 물길 너머로 보이는 높은 빌딩들과 그 아래 얽히고설킨 을지로의 골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