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들>
<섬들>
일요일 오후, 린은 공장 옆에 딸린 좁은 숙소 방바닥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회색빛 공장 건물과 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벽에는 빛바랜 가족사진이 붙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 그는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셨다. 일주일에 단 하루, 이 일요일 오후만이 온전히 그의 시간이었다. 그는 며칠 전 시장에서 사 온 베트남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가장 깨끗한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청계천 변 공원에 도착하자,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린처럼 인근 공장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베트남 동료들이었다. “린! 여기야!” 먼저 와 있던 친구 후안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반갑게 서로의 어깨를 치고, 각자 가져온 간식거리를 펼쳐놓았다. 삶은 땅콩, 딱딱한 바게트 빵, 누군가가 집에서 만들어 온 스프링롤 몇 개. 그들은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아 모처럼 베트남어로 실컷 웃고 떠들었다. 고향 소식, 새로 나온 베트ナム 노래 이야기,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고된 일과 사장에 대한 불평들. 말은 거칠었지만,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그 시간은 위안이 되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공원 주변으로는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한국 사람들이 지나갔다. 어떤 이들은 신기한 듯 흘깃 쳐다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무심하게 지나쳤다. 조금 전에는 비싼 카메라를 든 젊은 남자가 그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찍기도 했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린은 그런 시선에 익숙해지려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자신들이 이 도시의 이국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장식품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린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청계천 물길 너머로 보이는 높은 빌딩들과 그 아래 얽히고설킨 을지로의 골목들. 그는 저곳 어딘가에서 매일 10시간 넘게 재봉틀을 돌리거나 무거운 짐을 나른다. 서울에 오면 돈을 많이 벌어 고향에 집도 짓고 가족들을 편히 모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월급은 생각보다 적었고, 생활비는 비쌌으며, 외로움은 수시로 그를 덮쳤다. 휴대폰으로 잠시 고향의 가족과 영상 통화를 했다. 밝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통화가 끝나자 더 깊은 향수가 밀려왔다.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왔을 때,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다음 달 비자 연장 문제로 걱정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고향의 애인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웃음소리는 잦아들고, 간간이 한숨 소리가 섞여 나왔다. 린은 말없이 친구 꾸엔이 건네는 싸구려 담배를 받아 피웠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꿈을 안고 이곳에 왔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각자의 무게를 힘겹게 견디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공원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자, 친구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일 새벽같이 출근해야 하는 몸들이었다. “다음 주에 또 보자.” “몸조심하고.”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린은 멀어져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지금 이곳에 모였던 자신들은, 이 거대한 도시에 떠 있는 작은 섬들과 같다는 것을. 서로에게 잠시 외로움을 달래주는 기댈 곳이 되어주지만, 결국 각자의 섬은 홀로 존재했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고단함이라는, 보이지 않는 물결이었다. 이 일요일 오후의 짧은 위안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망망대해 같은 현실 속으로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표류해야 했다. 이 불안정한 상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 느낌이야말로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린은 다시 혼자가 되어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을지로의 상점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낮 동안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그 불빛들은 차갑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피로감이 뒤섞였다.
좁은 숙소 방에 돌아온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휴대폰에서는 조용한 베트남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선율 너머로,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를 현실로 끌어당길 공장의 기계 소음이 벌써부터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일요일 오후는 짧았고, 또 다른 고된 한 주가 섬처럼 고립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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