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1장

비였다, 또다시. 영원히 내릴 것만 같은 비가 창백한 손가락으로 퍼마글라스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토독, 유리 너머의 세상은 온통 젖어 흐릿했고, 네오-서울은 거대한 회색 짐승처럼 몸을 웅크린 채 차가운 빛의 눈물만 뚝뚝 흘려보내는 듯했다. 저 아래, 기업 광장의 홀로그램 광고판들이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현란하게 몸부림쳤다. 색색의 빛깔들이 퍼져나가며 뒤섞이는 모습은, 마치 잊힌 꿈의 조각들이 물감처럼 녹아 번지는 것 같았다. 엘스페스 할러웨이는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그 풍경을, 아니, 풍경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의식 위로 흘러드는 감각의 소용돌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이 비는 언제나 그녀를 오래전, 모든 것이 단단하고 명확했던 시절로 데려가곤 했다. 축축한 흙냄새, 바람에 실려오던 라일락 향기, 햇살 아래 빛나던 할머니의 정원… 기억은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했지만, 비가 내릴 때면 그 감촉만은 피부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것은 축축하고 차가운 합성 섬유의 감촉뿐인데도.

그녀의 눈, 그들이 '교정'해주었다고 말하는 왼쪽 눈이 미세하게 깜박였다. 도시의 광적인 데이터 맥박과 함께, 시야 가장자리에 의미 없는 정보 조각들이 먼지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오늘의 활력 증진제! 20% 할인!*> <*코르포-리얼리티 가상 체험, 지금 바로 접속!*> 성가신 속삭임들. 신경망 레이스를 통해 희미하게 흘러드는 도시의 집단 무의식은 배경 소음처럼 그녀의 생각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그저 흘러들어온 데이터의 파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살짝 눌렀다. 잠시,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이 끊임없는 속삭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 그리고… 영양 반죽. 생각의 흐름 속에 둔탁하게 끼어든 불청객. 찬장을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 튜브의 무게감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텅 빈 가벼움. 그것은 외출을 의미했다. 저 아래, 소란스러운 광장을 가로질러, 무표정한 자동 디스펜서 앞에 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차가운 금속과 인공적인 빛, 합성된 향기,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무심하게 견뎌내는 사람들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엘스페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진 듯했다.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혹은 반투명한 에너지 차폐막 아래에서 무표정하게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있었던가? 그녀는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떠오르는 것은 매끄러운 인공 피부와 무감한 광채를 내뿜는 증강된 눈동자들뿐이었다. 저 소음 속으로, 저 빛의 홍수 속으로 나아갈 엄두가 쉬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 낡은 의자 속에서,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편이…

하지만 배고픔은 기억이나 감상과는 다른 종류의 현실이었다. 그것은 몸의 요구였고, 외면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였다. 엘스페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낡은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그녀의 얇고 낡은 외피를 걸치고, 다시 한번 유리와 비의 순간들 속으로 걸어 나가야 했다.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2장

몸을 일으키는 그 단순한 행위조차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낡은 뼈마디가 시간의 더께를 이고 삐걱거리는 소리. 엘스페스는 잠시 서서, 방 안을 가득 채운 흐릿한 회색빛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가늠하듯 숨을 골랐다. 이 작은 공간. 그녀의 삶이 응축된, 닳고 닳은 물건들의 조용한 아우성. 벽에 걸린 오래된 프린트 – 지금은 색이 바랬지만, 한때는 푸르렀을 바다 풍경. 손때 묻은 독서 단말기. 공기 정화 장치가 내뿜는 미약한 오존 냄새와, 어딘가 스며든 오래된 차 향기가 뒤섞여 희미하게 감돌았다. 이곳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섬이었다. 바깥의 소란스러운 바다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는, 위태롭지만 익숙한 피난처.

옷장이라기엔 너무 작은 벽감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합성 섬유로 된 겉옷. 만져보면 차갑고 약간 뻣뻣한 감촉. 그녀는 그것을 꺼내 어깨에 걸쳤다. 옷감이 그녀의 마른 몸 위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득, 꺼져 있는 통신 패널의 검은 화면 위로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시간이 연필로 스케치한 듯한 얼굴 윤곽, 관자놀이 근처에서 희미한 푸른빛을 내는 신경망 레이스 포트. 저것이 정말 그녀인가? 아니면 기계 속을 떠도는 또 다른 유령일 뿐인가? 그녀는 자신의 눈, 증강된 왼쪽 눈과 아직 그녀 자신의 것인 오른쪽 눈을 차례로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도시의 차가운 빛을 반사했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그저 피곤하고 흐릿할 뿐이었다.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문 앞에 서는 것. 그러나 문을 열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매번 새롭게 겪어야 하는 감각의 폭격. 문 잠금장치가 '딸깍'하고 풀리는 소리가 작은 공간 안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리고 복도. 문이 열리자, 재순환된 공기의 물결이 확 밀려들었다. 천장의 형광 스트립 조명이 단조롭게 윙윙거렸고, 이웃집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악 소리가 멀리서 규칙적인 북소리처럼 둥둥 울렸다. 어제와 같은 복도, 내일도 같을 복도. 하지만 그녀의 예민해진 감각에는 매번 새로운 위협처럼 다가왔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차갑고 빠르게 흐르는 강물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하강감. 숫자가 빠르게 줄어드는 작은 화면을 응시하며,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영양 반죽을 사고, 다시 이 고요한 섬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경망 레이스를 통해 도시의 소음이 다시 희미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수백만 개의 목소리, 수백만 개의 욕망, 수백만 개의 데이터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합창.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면, 저 소리의 바다 한가운데에 서게 될 터였다.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3장

엘리베이터가 한숨처럼 멈춰 섰다. 금속성의 숨결이 멎었다가 풀려나는 소리.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로비가 눈앞에 펼쳐졌다. 차갑고 반짝이는, 어딘가 살균된 듯한 광활함. 바닥은 어두운 거울처럼 주변의 빛을 반사했고, 희미하게 자동 안내 방송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 건물은 코넥스 사의 보안 시스템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방문객께서는…*> 입구 근처의 가상 연못에서는 홀로그램 잉어들이 기업 로고가 새겨진 비늘을 번쩍이며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었다. 생명 없는 생명의 완벽한 모방. 엘스페스는 잠시 그 인공적인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저토록 평온해 보이는 몸짓이라니. 그녀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리고 거대한 유리문이, 마치 세계를 가르는 상처처럼, 양쪽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열렸다.

도시가 밀려들었다. 소리와 빛과 냄새의 해일이었다. 빗소리는 건물 안에서 듣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고, 윙윙거리며 지나가는 차량 소리, 광장의 스피커들에서 터져 나오는 각기 다른 음악과 광고 소리가 뒤섞여 귀를 때렸다. 네온과 홀로그램이 젖은 퍼마크리트 바닥 위에서 피처럼 번져 나갔다. 잿빛 하루의 살갗 위에 그어진 저속하고 화려한 상처. 축축한 공기 속에는 오존 냄새와 차량의 매캐한 배기 가스 냄새, 근처 푸드 카트에서 풍기는 달콤하면서도 역한 합성 향료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엘스페스의 왼쪽 눈 임플란트가 다시 깜박였다. <*애퍼처 코프: 더 밝게 보세요!*> 지나가는 배달 드론의 몸체 위로 광고 문구가 겹쳐 보였다. 그녀는 코트 깃을 여몄다. 마치 거친 바다 위로 나서는 작고 연약한 배처럼. 얼굴에 차가운 빗방울이 와 닿았다.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산과 반투명 에너지 차폐막의 물결. 그 사이로 서둘러 움직이는 형체들. 그들의 얼굴은 스쳐 지나가는 가면 같았다. 증강된 눈동자는 무심하게 앞을 향했고,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군중 속의 고독. 아니, 군중 자체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비인격적인 존재감 속에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밀려드는 감각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생각은 조각나고, 외부의 소음은 그녀 내면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려 했다.

디스펜서.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반짝이는 비와 서두르는 몸들의 바다 건너편에. 그녀는 심호흡을 하려 했지만, 들이마신 것은 차갑고 축축한, 매연 냄새 섞인 공기뿐이었다.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마치 끈적이는 진흙 속을 걷는 것처럼 힘들었다. 모든 감각이 아우성쳤고, 그녀는 그저 이 소란 속에서 자신의 작은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 할머니의 정원에서 맡았던 흙냄새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매캐한 합성 향료 냄새에 곧바로 흩어져 버렸다.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4장

그녀 주위로 사람들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빠르고, 무심하게. 부딪힐 듯 스쳐 지나가는 몸들. 때로는 누군가의 팔꿈치가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했고, 축축한 외투 자락이 얼굴을 스치기도 했다. 그녀는 그저 흐름 속의 돌멩이처럼,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며 더디게 나아갈 뿐이었다. 광장은 끝없이 넓어 보였고, 저편의 디스펜서는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바로 옆에서 거대한 홀로그램 게이샤가 허공에 피어올랐다. 거의 6미터는 됨직한 키에,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합성 실크의 감미로운 약속을 속삭였다. <*천상의 부드러움, 지금 당신의 피부에…*> 엘스페스는 움찔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허깨비의 옷자락이 그녀의 코트 위를 통과하며 지나갔다. 아무런 감촉도 없었지만, 기분 나쁜 한기가 스몄다.

임플란트가 다시 한번 번쩍였다. <*칼로리 팩 7: 최적화된 영양 공급!*> 바로 그때, 그녀의 시선이 퍼마크리트 바닥의 갈라진 틈새에 달라붙은, 작지만 꿋꿋한 녹색 이끼 조각에 닿았다. 찰나의 순간, 네온 불빛과 홀로그램 광고의 홍수 속에서 발견한 그 생명의 흔적. 너무나 작고 연약했지만, 그 어떤 거대한 광고판보다도 강렬하게 그녀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할머니의 정원, 축축한 흙냄새, 손끝에 느껴지던 이끼의 부드러움…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가, 지나가는 차량의 굉음에 다시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웠다. 데이터와 축축함이 뒤엉킨 이 무겁고 질척이는 대기 속에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끌어당겨야 했다.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차가운 습기와 함께 도시의 온갖 냄새들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마치 물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늘어지고, 소리는 뭉개지고, 시야는 빗물과 빛의 얼룩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저기였다. 디스펜서. 얕은 처마 아래에서 희미하게 윙윙거리는, 매끈하게 닦인 크롬과 차가운 푸른빛의 덩어리. 그 표면은 광장의 현란한 빛의 춤을 반사하며 의미 없는 줄무늬로 왜곡시키고 있었다. 기계 앞에는 두어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그녀는 그들 뒤에 조용히 섰다. 앞선 젊은 남자는 텅 빈 눈으로, 귀 뒤에서 인터페이스 촉수가 뱀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는 화면에 자신의 지불 코드를 아무 말 없이 입력하고는, 꾸벅 잠시 졸다가 기계가 뱉어낸 영양 팩을 받아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어떤 표정도,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드디어 그녀의 차례. 기계는 아무런 감정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서, 영양분과 함께 상투적인 문구를 내뱉을 준비가 된 합성된 목소리가 잠자고 있을 터였다. <*환영합니다, 시민 번호 734-…*> 엘스페스는 잠시 망설였다. 차가운 금속판 위에 손을 얹는 아주 단순한 행위. 그러나 그것은 마치 이 거대하고 무심한 시스템과의 또 다른 접속, 또 다른 항복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가락을 차가운 스크린 위로 뻗었다.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5장

그녀의 손가락 끝, 얇고 차가운 살갗이 스크린의 더 차가운 유리에 닿았다. 접촉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환영합니다, 시민 번호 734-Delta-9. 엘스페스 할러웨이 님. 오늘도 활기찬 하루 보내세요!*> 합성된 목소리는 끈질기게 명랑했고, 매끄럽게 닦인 플라스틱처럼 인공적이었다. 엘스페스는 그 목소리가 매번 그녀의 신경을 긁는다고 생각했다. 진심 없는 친절만큼 공허한 것이 또 있을까. 화면에는 그녀의 계정 정보와 함께 영양 반죽 옵션들이 떠올랐다.

<*영양 반죽 7번, 표준형. 구매하시겠습니까? 코넥스 포인트 0.5점 적립 예정!*> 그 아래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해 보이는 가족이 활짝 웃고 있는 이미지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엘스페스는 '확인' 아이콘을 눌렀다. 손가락 끝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지불이 완료되었다는 신호.

기계가 부드럽게 윙윙거리며 작동했고, 살균된 듯한 튜브 하나가 디스펜서 슬롯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칙칙한 회색 플라스틱 표면에 어디에나 찍혀 있는 코넥스 로고가 선명했다. 이것이 그녀가 이 험난한 여정을 감수한 이유였다. 이 차갑고 맛없는 생명의 연료. 그녀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차가운 원통을 감싸 쥐는 순간…

빛. 그녀의 눈 뒤에서 빛이 피어올랐다. 차가운 네온 불빛이 아니었다. 따스하고, 황금빛을 띤 햇살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초록색 잎사귀들이 그림자에 얼룩져 있었고, 축축한 흙냄새와 장미 향기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그녀는 숨을 헙 하고 들이마셨다.

정원. 할머니의 정원. 아니면 기계가 만들어낸 환영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갈망이 물리적인 힘처럼 그녀를 강타했다.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듯한 통증. 동시에 사무치는 그리움. 진짜였던 것,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것, 후각과 촉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 그녀의 진짜 눈은 기억을 위해 울고 있었고, 증강된 눈은 여전히 잔인한 신기루를 투사하고 있었다. 초록과 황금빛, 그리고 축축한 비와 회색 도시의 현실이 고통스럽게 뒤섞였다.

그러다 문득,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회색 비와, 무심한 군중과, 그녀의 손에 꽉 쥐어진 차가운 영양 반죽 튜브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마치 천둥이 친 뒤에 찾아오는, 귀가 먹먹한 정적 속에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광장의 소음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한 꺼풀 벗겨진 듯, 더 날카롭고 더 공허하게 다가왔다.

손안의 튜브가 차갑게 느껴졌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이 튜브와, 이 비와, 이 고독이. 하지만 방금 전의 그 찰나의 순간, 그 강렬했던 빛과 향기 또한 그녀에게는 현실이었다. 그녀 내면의 현실. 누구도, 어떤 기계도 빼앗아갈 수 없는.

집. 집으로 가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디스펜서의 차가운 푸른빛을 등지고, 다시 한번 군중과 비를 마주하며.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과 같았지만, 엘스페스 할러웨이는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아주 작고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6장

다시 광장이었다. 조금 전과 똑같은 빛과 움직임의 혼돈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이제 그녀의 인식 속에서는 무언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색깔 있는 유리를 통해 익숙한 방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딘가 다른 색조를 띠고 있었다. 주머니 속 영양 반죽 튜브의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이 그녀를 현재에 묶어두는 닻처럼 느껴졌다.

그녀 내면의 불씨… 그래, 그것은 비에 맞서 그녀를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 위에 다른 종류의 빛을 던져주는 듯했다. 홀로그램 광고들은 이제 더 평면적으로 보였고, 그들이 속삭이는 약속은 더 공허하게 들렸으며, 현란했던 색깔들은 어딘지 모르게 빛이 바랜 듯했다. 방금 전 그녀의 의식을 가득 채웠던, 기계가 만들어낸 햇빛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곳, 그녀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진짜 햇빛의 힘 때문일까?

군중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 딱히 더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몸들이 부딪혀왔고, 소음은 귀를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주의력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 경계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면으로 향한 집중이었다. 그 집중이 밀치고 지나가는 몸들을 조금 덜 즉각적이고, 조금 덜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마치 반쯤 잠긴 의식으로 소란스러운 꿈속을 걷는 것처럼.

고맙게도, 임플란트는 조용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주의는 이제 다른 곳에 있었다. 손안의 차가운 튜브의 감촉, 폐부를 채우는 축축한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방금 전의 그 강렬했던 순간의 잔상에. 그것은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뒤 하늘에 잠시 머무는 무지개처럼, 그녀의 내면 풍경 위에 희미하지만 선명한 아치를 그리고 있었다.

건물이 저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사드 위로 그녀의 작은 창문이 어두운 사각형으로 떠 있었다. 집. 그녀의 섬. 거의 다 왔다.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 낡은 복도,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네 벽이 주는 조용한 윙윙거림 속으로. 그곳이라면 햇빛의 기억이, 방해받지 않고 잠시 더 머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건물 입구의 자동문이 다시 그녀를 향해 미끄러지듯 열렸다. 로비의 인공적인 평온함이 그녀를 감쌌다. 바깥의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항구로 막 들어선 기분이었다. 홀로그램 잉어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헤엄치고 있었고, 안내 방송은 같은 문구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스페스는 이제 그것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다시 그녀만의 작은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영양 반죽 튜브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거의 다 왔다.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7장

엘리베이터는 그녀를 태우고 부드럽게, 소리 없이 상승했다. 1층의 살균된 듯한 극장에서 벗어나, 위로, 더 위로. 숫자들이 깜박이며 올라갔다. 그녀가 이 수직의 미로 속으로 다시 후퇴하는 것을 세는 것처럼. 바깥세상의 소음은 이제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희미한 기계음만이 그녀의 고독한 상승을 에스코트했다. 조금 전 광장에서 겪었던 강렬한 순간의 잔상이 아직도 그녀의 의식 가장자리에 어른거렸다. 햇빛, 초록 잎사귀, 흙냄새… 그것은 이제 고통스럽기보다는,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한 비밀스러운 보물처럼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복도가 나타났다. 그 희미한 조명과 낮은 윙윙거림은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저 무뎌지고 빛바랜, 그녀 삶의 배경일 뿐이었다. 그녀의 아파트 문이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고, 거의 환영하는 듯 부드러운 '딸깍'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문을 닫았다. 복도의 윙윙거림과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도시의 포효가 차단되었다. 안의 공기는 고요했고, 어제 우려 마신 차의 희미한 향기와 재순환된 산소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문에 기댄 채 서서, 이 정적과 익숙한 냄새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마치 물속에 오래 잠겨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와 첫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주머니에서 영양 반죽 튜브를 꺼냈다. 차가운 감촉. 그녀는 그것을 조리대 옆 작은 선반, 식품 합성기 옆에 놓았다. 내일의 식량. 차갑고, 아무런 매력도 없는.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리듯, 그녀는 다시 창가로, 낡은 안락의자로 돌아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네온 불빛은 여전히 젖은 표면 위에서 번지고 있었고, 도시는 여전히 그 끊임없는, 인공적인 생명력으로 맥박치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변해 있었다. 바깥세상이 아니라, 그녀의 눈 뒤, 작고 조용한 공간 속에서.

햇살 가득한 정원의 기억… 그것은 이제 환영처럼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한 확신처럼, 그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된 온기처럼 남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인공적인 빛 속에서도, 그녀 안에는 그녀만의 진실한 공간이 있다는 증거. 기계의 오류가 역설적으로 그녀 자신의 가장 깊은 현실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엘스페스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창밖의 빗소리가 이제는 자장가처럼 들리는 듯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피곤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온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잿빛 도시의 풍경 대신, 그녀의 의식 속에는 다시 한번, 아주 희미하게, 황금빛 햇살 아래 반짝이는 초록 잎사귀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리와 비의 순간들 (Moments of Glass and Rain) - 제 8장

안락의자가 그녀를 안았다. 해 질 녘의 어스름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포옹이었다. 시간은 이제 다른 속도로 흐르는 듯했다. 바깥세상의 분주한 시계 초침 소리는 멀어지고, 그녀 내면의 느리고 부드러운 리듬만이 남았다.

비는 유리창 너머에서 속삭였다. 도시 자체가 불러주는 자장가처럼. 창밖으로는 여전히 네온의 강물이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곳, 이 네 개의 벽 안에서, 그리고 그녀 의식의 부서지기 쉬운 조개껍질 안에서는 다른 종류의 흐름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원… 이젠 더 이상 날카로운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초록의 감각, 태양에 데워진 흙의 느낌, 생각의 표면 아래에서 부드럽게 고동치는 맥박과 같았다. 어쩌면 기계의 오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잊고 있던 그녀 자신의 일부가, 필사적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려 했던 것인지도.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한지도 몰랐다. 이 조용한 움켜쥠. 이 끊임없는 소음 속에서 온전히 용해되기를 거부하는 것. 그녀의 작은 창문 너머로 펼쳐진 거대하고 차가운 세상에 맞서, 그녀 자신의 내밀한 온기를 지켜내는 것.

생각의 가장자리가 부드러워졌다. 빗소리의 리듬 속으로 흐릿하게 번져나갔다. 수면이 부드러운 회색 파도처럼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눈꺼풀은 이제 완전히 감겨 있었고, 호흡은 깊고 평온해졌다.

그저 비… 그리고 조용한 어둠… 그리고 오랫동안 남아 있는 온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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