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온의 메아리 (Neon Echoes) Act 1: 디지털 유혹의 밤 (Night of Digital Temptation)

 

네온의 메아리 (Neon Echoes)

Act 1: 디지털 유혹의 밤 (Night of Digital Temptation)

네온. 보랏빛, 시리도록 푸른빛, 피처럼 붉은빛. 빛줄기들이 엉겨 붙어 시야를 태웠다.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베이스의 진동이 갈비뼈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아니, 심장이 있던 자리를 두드리는 듯했다. 네온 한강 아르콜로지, 그 거대한 강철과 유리의 탑들이 뱉어내는 오염된 숨결 아래 파묻힌 지하 클럽 ‘크롬 엘리시움’. 여기는 중력 대신 소리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곳. 합성 베이스 음이 바닥을, 벽을, 내 몸 속 장기들을 끊임없이 흔든다. 액체처럼 농밀한 소리.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빛줄기들. 푸른색 레이저는 안개를 칼처럼 베고 지나가고, 붉은 조명은 벽에 튄 피처럼 번들거린다. 보랏빛 안개는 싸구려 향수와 땀 냄새,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하면서도 역겨운 화학적 베이프 향과 뒤섞여 후각을 마비시킨다. 어쩌면 마비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는 것일지도. 사무실의 건조하고 메마른, 형광등 불빛 아래 잠자고 있던 감각들. 월요일이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겠지. 플라스틸 책상,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위로 손목을 누르는 익숙한 압박감. 쌓여가는 전자 메일 알림음, 종이 서류의 바스락거림, 복도 끝 정수기에서 물 따르는 소리, 동료의 무미건조한 키보드 소리… 그 모든 회색빛 소음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멀리, 다른 우주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다. 그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네온이다. 빛이, 소리가, 냄새가 나를 감싼다. 벗어날 수 없는 고치처럼. 아니, 내가 기꺼이 파고든 안식처처럼.

발걸음을 옮긴다. 바닥은 술과 이름 모를 액체들로 질척거린다. 발을 뗄 때마다 쩍, 하고 달라붙는 소리가 난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어쩌면 정말 늪일지도 모른다. 현실이라는 마른 땅에서 도망쳐 온, 빛과 소리의 늪. 어제 늦게까지 붙들고 씨름했던 보고서의 무게가 아직도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하지만 괜찮다. 여기서는 모두가 무언가에 짓눌려 있다. 음악에, 술에, 약에, 혹은 이름 모를 욕망에.

군중 속으로 파고든다. 서로의 몸이 스치고 부딪힌다. 뜨거운 살갗의 열기, 땀 냄새, 인공적인 향수 냄새가 뒤섞여 숨 막힐 듯한 공기를 만든다. 사람들의 얼굴 위로, 옷 위로, 허공 위로 AR(증강현실) 영상들이 어지럽게 떠다닌다. 어떤 이의 눈에서는 프랙탈 무늬가 나비처럼 날아오르고, 다른 이의 팔뚝에서는 기하학적인 문신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클럽 천장에서는 홀로그램 댄서들이 관능적인 춤을 추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씩, 마치 접속 불량처럼, 그들의 형상이 픽셀 단위로 깨지거나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저 깨진 이미지들. 내 머릿속 풍경과 닮았다. 어쩌면 저들은 진짜 춤추는 게 아닐지도 몰라. 그저 깨진 데이터 조각들이 아닐까? 우리 모두처럼.

바 쪽으로 향한다. 길고 번쩍이는 금속 카운터 너머로 바텐더가 보인다. 그의 팔 한쪽은 번쩍이는 크롬 의수다. 팔뚝을 따라 푸른색 서브더멀 LED 라인이 박동하듯 빛나고 있다. 그는 거의 표정 없는 얼굴로, 기계적인 정밀함으로 잔에 형광색 액체를 따른다. 그 액체는 잔 안에서 스스로 빛을 내며 소용돌이친다. 흡사 도시의 정맥, 오염된 한강의 물결처럼. 그가 내민 잔을 받아든다. 차가운 유리잔의 감촉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진다. 그는 의수를 들어 잔을 채우며 기계 관절이 맞물리는 소리를 낸다. 짤깍. 아주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 한 잔 더? 그의 입 모양을 읽는다. 아니, 어쩌면 그냥 내 머릿속에서 울린 소리일지도. 지난주 회의실에서 들었던 김 대리의 메마른 목소리 같다. 그 목소리, 마치 잘 벼린 종이 날에 베인 듯 따끔거렸지. 그의 눈은 어딜 보고 있는 걸까? 나일까? 아니면 내 뒤의 홀로그램 댄서? 아니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걸까? 기계의 눈은 무엇을 볼까?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강렬한 알코올 향과 함께 코를 찌르는, 달콤하면서도 인공적인 과일 향. 아마도 나노 기술로 만든 향미 입자겠지. 한 모금 삼킨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식도를 태우는 듯한 뜨거움을 남긴다. 동시에, 미세한 전기 자극 같은 것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나노드러그가 함유된 술이다.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동시에 흐릿해지는 기묘한 느낌. 세상의 경계선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저 멀리 쿵쾅거리는 베이스 음이 이제 내 심장 박동과 구분되지 않는다. 아까부터 궁금했지. 저것이 음악 소리인지, 아니면 내 안의 고동인지. 아니면 사무실 책상 위 디지털시계가 초침을 넘기는 소리인가. 똑딱, 똑딱. 마감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재깍거리는 그 소리.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다. 뒤섞이고, 녹아내리고, 분해된다.

비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힌다. 짜증 섞인 목소리. *“야, 똑바로 안 다녀? 이 회사 벌레 같은 게.” 목소리의 주인은 화려한 네온 컬러 머리카락을 한 여자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는 AR 렌즈가 소용돌이치는 담쟁이덩굴 무늬를 투사하고 있다. 그녀의 말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날아와 박힌다. 상사의 짜증 섞인 잔소리처럼, 동료들의 은근한 비웃음처럼. 심장이 움찔하지만, 괜찮다. 곧바로 다른 감각들이 밀려와 그 불쾌함을 덮어버린다. 네온 빛의 현란한 파도, 고막을 때리는 음악의 해일, 술과 약기운이 만들어내는 황홀한 해방감. 그래, 해방감. 내가 여기 온 이유. 그 회색빛 건물, 회색빛 책상, 회색빛 얼굴들로부터의 도피. 단조로운 현실로부터의 일탈.

다시 몸을 흔든다. 음악에 맞춰. 아니, 음악이 나를 흔드는 것에 맞춰. 레이저 광선들이 춤추는 내 몸 위를 스쳐 지나간다. 어떤 것은 따스하게, 어떤 것은 차갑게 느껴진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 하지만 누구의 손길이란 말인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오직 이 순간뿐이다. 네온 빛이 내 살갗을 어루만지고, 음악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고, 알코올과 약물이 내 의식의 껍질을 녹여내리는 이 순간.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모든 것이 강렬해지는 이 모순적인 순간.

저 너머, 군중 속에서 유독 강렬한 빛이 느껴진다. 시선을 돌린다. 홀로그램 댄서들의 잔상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조명 효과? 아니다.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다. 마치 이 클럽의 모든 네온 빛을 한데 모아 응축시켜 놓은 듯한 존재. 그 존재가 나를 보고 있다. 아니,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 그 눈빛. 아까 레이저 광선이 휘어지며 만들어냈던 그 미소의 곡선과 닮았다. 아직 그녀의 이름을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안다. 저 존재가 이 밤의 심연으로 나를 이끌어갈 무언가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기꺼이, 따라갈 것이다.


공기 속을 떠다니던 무언가가 변했다. 진동하는 베이스 음 사이, 엉겨 붙은 땀과 향수 냄새 너머, 시야를 태우는 네온의 홍수 속에서, 미묘하지만 분명한 파문이 일었다. 마치 고요한 수면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처럼, 아니, 어쩌면 심해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클럽의 혼돈스러운 에너지가 한순간 방향을 바꾸는 듯했다. 내 안의 나침반이, 녹슬고 망가졌다고 생각했던 그 나침반이, 미친 듯이 빙글거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주 희미하게,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그저 내 신경계가 만들어낸 환청일까? 아까 마신 술 때문일까, 아니면 이 장소 자체가 원래 이런 종류의 환각을 유발하는 걸까?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마치 네온 안개 속에서 형체를 갖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네온 안개 그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응축된 것처럼. 그녀는 군중 속을 유영하듯 걸어 나왔지만, 그녀 주변의 공간은 기묘하게 뒤틀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피해 길을 터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중력장처럼 작용하여 주변의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할리퀸. 광대. 예측 불가능한 색채와 패턴의 옷. 금속성 실로 짠 듯한 천 조각들이 몸 위에서 조각보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 위로는 가느다란 LED 라인이 전류처럼 흘렀다. 단순한 옷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언, 혹은 위장 같았다. 저 화려함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아니면 저 화려함 자체가 그녀의 본질일까?

더욱 기묘한 것은 그녀의 피부였다. 맨살이 드러난 팔과 목덜미 위로, 푸른색과 자줏빛의 AR 문양들이 홀로그램처럼 피어올랐다가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살아있는 문신처럼, 혹은 그녀의 기분에 따라 색과 형태를 바꾸는 카멜레온의 피부처럼. 어떤 때는 기하학적인 불꽃 같기도 했고, 어떤 때는 꿈틀거리는 담쟁이덩굴 같기도 했다. 사무실 내 자리의 스크린 세이버 속에서 끝없이 흘러내리던 디지털 폭포수와는 전혀 다른, 생명력이 느껴지는 움직임. 저것은 기술인가, 마법인가? 아니면 그저 내 취한 눈이 만들어내는 착각일 뿐인가?

그리고 그녀의 눈. 세상의 모든 네온 빛을 빨아들여 그 안에서 태워버리는 듯한 눈동자. 인공적인 디지털 불꽃처럼 타오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반짝였다. 저 눈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던, 죽은 듯 고요한 회색 빌딩들의 행렬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 저 눈빛은 살아있다. 아니, 살아있는 것 이상이다. 생명을 부여하고, 또 앗아갈 수도 있을 것처럼 강렬하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아니, 나를 꿰뚫어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클럽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 멀어지는 듯했다. 사무실 형광등의 낮은 웅얼거림처럼, 배경으로 존재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그 모든 소리들이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처럼. 내 피부가 따끔거렸다. 정전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시선 자체가 가진 어떤 물리적인 힘 때문일까?

그녀가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듯, 혹은 꿈속을 걷듯.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공기 중에 떠돌던 인공적인 재스민 향이 짙어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 사무실 방향제에서 나던 싸구려 라벤더 향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농밀하고, 매혹적이고, 어딘가 위험한 느낌을 주는 향기였다. 내 앞에 선 그녀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때로는 장난기 가득한 10대 소녀처럼 천진난만해 보였고, 때로는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고대의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붉은색, 인공적인 체리 맛 사탕 같은 색깔.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도전적이고, 유혹적이며, 장난기 넘치는 그 눈빛. 나와 함께 이 밤의 더 깊은 곳으로 가보지 않겠냐는 무언의 초대. 거부할 수 없는 끌림. 달콤한 독약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그 눈빛.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혹은 심장이 있던 자리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떨림은 흥분일까, 공포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그녀의 미소가 깊어졌다. 매혹적이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 저 미소는 진짜일까? 아니면 그녀의 얼굴 근육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가짜 표정일까? 내 책상 서랍 속에 처박아 둔, 오래된 가족사진 속 어머니의 희미한 미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우리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가 먼저 움직였고, 나는 자석에 끌리듯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몸짓은 예측 불가능했다. 부드럽게 물결치다가도 갑자기 각진 로봇처럼 움직였고, 때로는 공기 중에서 잠시 멈춘 듯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몸을 감싼 옷의 LED 라인이 춤사위에 맞춰 색과 패턴을 바꾸었다. 빨강, 파랑, 초록, 보라… 현란한 빛의 향연 속에서 그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발광 생명체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허리를 스쳤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예상과는 다른 느낌.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마치 전선 피복이 벗겨진 곳에 손을 댄 것처럼. 아니, 사무실에서 정전기가 튀었을 때 느꼈던 그 불쾌한 따끔거림과는 달랐다. 이것은… 달콤한 고통, 혹은 위험한 쾌락에 가까웠다.

음악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 감각이 증폭된 것일지도 모른다. 베이스 음은 이제 내 몸 안에서 직접 울리는 듯했고, 레이저 광선은 더욱 날카롭게 시야를 갈랐다. 천장의 홀로그램 댄서들이 다시 깨지기 시작했다. 픽셀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무실의 낡은 프린터가 종이를 씹으며 에러 메시지를 뱉어낼 때의 그 짜증스러운 소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존재했다. 그녀의 움직임, 그녀의 빛, 그녀의 향기, 그녀의 존재감.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클럽 바닥의 끈적거리는 감촉과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 감촉이 뒤섞였다. 그녀의 인공적인 재스민 향과 사무실 탕비실의 퀴퀴한 커피 찌꺼기 냄새가 교차했다. 클럽의 맥동하는 네온 불빛과 사무실 책상 위 디지털시계의 냉정한 숫자들이 겹쳐 보였다.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 나와 그녀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약 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 자체가 이런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일까?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디지털 불꽃을 바라보며, 나는 그 혼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예측 가능한 그 회색빛 세계로부터의 완전한 탈출.

그녀가 춤을 멈췄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아귀는 놀랍도록 강했다. 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강함이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가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물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우리는 춤추는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사람들은 모세 앞의 홍해처럼 우리 앞에서 갈라졌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저 앞에, 클럽 안쪽 깊숙한 곳에,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듯한 입구가 보였다. 입구 양옆으로는 맥박치듯 깜빡이는 푸른색 네온 튜브가 세워져 있었다. VIP 룸. 그곳은 이 혼돈 속의 또 다른 고치, 혹은 심연으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보였다. 그녀가 그곳을 향해 나를 이끌었다. 그녀의 입가에 다시 한번 그 미소가 떠올랐다. 장난스러우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치명적인 미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과, 내 손을 잡은 그녀의 단단한 손아귀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나는 그 침묵의 약속에 응하며, 그녀의 손에 이끌려, 네온 빛이 맥동하는 그 미지의 공간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내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그래, 이 밤 속으로 더 깊이. 끝까지.


문턱 너머, 소리의 파도가 바뀌었다. 바깥의 날카로운 음파들은 이제 두꺼운 벽에 부딪혀 뭉개진, 저음의 울림으로 변해 방 안을 감쌌다.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고동 소리처럼,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하게. 공기는 차갑고 정제된 느낌, 인공적인 냉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인공 재스민과 미량의 오존. 이 공간은 그녀의 숨결로 가득 찬 밀실 같았다.

검은 거울 벽은 희미한 네온 빛을 집어삼켜 끝없이 반사하며 일그러뜨렸다. 푸른빛, 붉은빛, 보랏빛의 조각들이 거울 속 어둠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다. 현실인가, 환영인가. 저 너머에 또 다른 내가 있는가? 아니면 그저 빛의 장난일 뿐인가. 방 중앙의 검은 소파는 차가운 유혹처럼 느껴졌다. 사무실의 낡은 의자와는 너무 다른,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 그녀가 나를 그 위로 끌어당겼을 때, 서늘한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는 듯한 차가움.

그녀가 옆에 앉자, 모든 것이 너무 가까웠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숨결, 피부 위에서 춤추는 AR 문양들. 푸른색과 자줏빛의 문양들이 네온 빛을 받아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들.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타오르는 디지털 불꽃.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사무실 창밖의 회색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살아 숨 쉬는 불꽃.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차갑고 매끄러운 손가락. 그 손길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 숨결이 뒤섞였다. 그리고… 키스.

세상이 녹아내렸다. 클럽의 네온 빛, 그녀의 눈동자 속 불꽃,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과 약물,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 폭발하는 듯했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우면서도 뜨겁고, 탐욕스러우면서도 부드러웠다.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아니, 그녀의 숨결이 나의 숨결이 된 것 같았다. 시간은 의미를 잃고 늘어졌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아침에 마셨던 커피의 쓴맛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각성. 감각의 폭발. 그녀의 혀가 내 입안을 헤집을 때, 짜릿한 전류가 온몸을 관통했다. 쾌락인가, 침범인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감각의 홍수에 몸을 맡길 뿐.

우리의 몸이 얽혔다. 소파의 차가운 표면 위에서, 거울 벽에 비친 네온 빛의 파편들 속에서.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튀는 듯했다. 피부와 피부의 마찰, 옷감의 스침, 가빠지는 숨소리.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재스민 향기는 더욱 짙어졌고,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가는 동시에 수많은 이미지와 감각들로 넘쳐흘렀다. 사무실의 잿빛 풍경, 서류 더미, 반복되는 일상… 그런 것들은 이제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지금 여기는 오직 그녀와 나,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네온 빛과 음악의 파동만이 존재했다.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그녀의 손이 잠시 멈췄다. 내 목덜미 근처에서. 귀 뒤쪽, 뉴럴 포트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그 작은 단자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은 이미 다음 감각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 흥분 속에서는 무엇이든 괜찮았다. 그녀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녀가 다른 손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아주 작은, 반딧불이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물체. 작은 칩 형태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아마도… 또 다른 종류의 전자 드러그겠지. 클럽에서 흔히 거래되는, 감각을 증폭시키거나 환각을 유발하는 그런 것들. 지금 이 흥분 속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더 강한 자극, 더 깊은 망각을 원했을 뿐.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디지털 불꽃.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나는 기꺼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칩을 든 그녀의 손가락과, 그것이 천천히 내 뉴럴 포트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비쳤다. 나는 그것을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강 건너 불꽃놀이를 보듯, 아름답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사건처럼. 그래, 더. 더 강하게. 이 밤을, 나를, 완전히 녹여버릴 무언가를.

그리고… 그것이 들어왔다.

작은 칩이 뉴럴 포트에 닿는 순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안으로 완전히 삽입되자, 내 안에서 빛과 소리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수천, 수만 개의 네온 불꽃이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 눈앞이 아니었다. 머릿속이었다. 혹은 온몸의 세포 속이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파랑, 뜨겁고 맥동하는 빨강, 깊고 부드러운 보라. 빛의 파편들이 서로 부딪히고 섞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색채의 우주를 만들어냈다. 귀에서는 수정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 금속이 휘어지는 듯한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속삭임들이 뒤섞여 울려 퍼졌다. 클럽의 음악 소리는 이제 저 멀리, 다른 차원의 소음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피부는 더 이상 경계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은 물론이고, 닿지 않는 곳까지도 미세한 전류가 흘렀다. 어떤 곳은 얼음처럼 차갑게, 어떤 곳은 용암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 그녀의 숨결,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감각의 증폭기를 거쳐 신경계를 직접 타격하는 듯했다. 온몸이 하나의 거대한 공명통이 되어 그녀의 존재에, 혹은 내 안에 들어온 그 미지의 것에 반응하고 있었다.

낯선 이미지들이 눈꺼풀 안쪽에서 명멸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더러운 골목길의 아스팔트.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 겁에 질린 듯 크게 뜨인 누군가의 눈동자 – 그 눈동자는 낯설었지만, 어쩐지 거울 속 내 눈동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지는 듯했다. 섬광.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다시, 그 로고. 차갑고 비정한 느낌의 기업 로고가 뇌리에 낙인처럼 찍혔다. 이 파편들은 어디서 오는가? 그녀인가? 칩인가? 아니면 나인가? 질문은 떠올랐지만,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했다. 생각의 실타래는 이미 끊어져 버렸다.

의식은 조각난 거울처럼 산산이 부서져, 빛과 소리와 감각의 소용돌이 속을 떠다녔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나와 그녀의 경계, 현실과 환상의 경계,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완전히 녹아내렸다.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끝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희열인가? 아니면 비명인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온몸의 세포가 별처럼 반짝이며 타오르는 듯했고, 동시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듯했다.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이 압도적인 감각의 폭풍뿐.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여러 개의 잔상으로 겹쳐진 채.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깊고 강렬하게 타오르며, 이 모든 혼돈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네온 빛의 강물 속으로, 소리의 폭풍 속으로, 감각의 심연 속으로.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빛과 소리, 감각의 파편들만이 남아 어지럽게 춤추고 있었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마지막 감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별들이 부서지는 듯한, 찬란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소리. 그리고… 모든 것이 하얗게, 혹은 검게, 점멸했다.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눈꺼풀 아래로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느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하다. 초점이 맞지 않는다. 천장인가? 아니면 벽? 검은 거울 표면 위로 네온 불빛의 잔영이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푸른빛, 붉은빛, 보랏빛. 하지만 그 빛들은 힘이 없었다. 마치 먼 기억 속의 색깔처럼 희미하고 탁했다. 아까의 그 생생하고 강렬했던 빛의 폭풍은 어디로 갔을까?

몸을 일으키려 했다. 욱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특히 등과 어깨가 딱딱한 바닥에 눌려 아팠다. 여기가 어디지? 아… VIP 룸. 소파가 아니었다. 차갑고 단단한 바닥 위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누워 있었던 걸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기억은… 빛과 소리의 소용돌이. 그녀의 눈동자. 그리고…

그녀는 없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까까지 공간을 가득 채우던 그 농밀한 존재감, 인공 재스민과 오존의 향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차갑고 메마른 공기와 희미한 먼지 냄새,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비릿한 금속성 냄새만이 감돌았다. 고요했다. 클럽의 둔탁한 베이스 음조차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갑자기 증발해 버린 것처럼. 이 침묵은 어색하고, 불안했다.

귀 뒤쪽. 뉴럴 포트 근처. 여전히 무언가가 고동치고 있었다. 욱신, 욱신. 아주 미세하지만 끊임없는 진동. 신경을 거슬리는 불쾌한 감각. 마치 살갗 아래 작은 기계가 심어져 박동하는 것 같았다. 손을 가져가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 이질적인 감각을 느끼며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고동과 함께, 눈앞에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의지와 상관없이. 빗물이 고인 어두운 골목길. 바닥에 번들거리는 검붉은 얼룩.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 그리고… 로고. 차갑고 날카로운 선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문양.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로고는 잠시 머릿속을 맴돌다가, 하얀 모니터 불빛과 깜빡이는 커서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다시 골목길. 빗소리. 로고. 이 단절된 이미지들은 무엇일까? 왜 내 머릿속에 나타나는 걸까? 그녀가 남긴 흔적? 아니면…

테이블 위.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길고 날렵한 형태. 칼. 반투명한 세라믹 재질인 듯, 주변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것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아까 그녀가… 내려놓았던가? 기억이 불분명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차갑고 매끄러운 칼자루에 닿았다. 그 감촉.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놀랍도록 손에 꼭 맞았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 온 물건처럼. 무게감이 느껴졌다. 가볍지만, 단단한. 손가락 마디마디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칼날 끝의 푸른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은… 무엇이지? 왜 내 손에 이렇게 익숙하게 잡히는 걸까?

콰앙-!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방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문이… 문이 안쪽으로 터져 들어왔다! 나무 파편과 먼지가 공중으로 솟구쳐 시야를 가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

기침을 하며 먼지를 털어내려 애썼다. 눈을 깜빡였다. 부서진 문틀 너머,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들이 보였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하지만 위압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유선형의 슈트. 얼굴은 없었다. 매끈한 검은 패널. 그리고 그 위에… 붉은 빛 두 개.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며 방 안을 훑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눈동자처럼. 아니, 살아있는 것과는 다른, 더 차갑고 기계적인 움직임.

그 붉은 빛이 나에게서 멈췄다. 나를… 보고 있다.

숨 막히는 정적.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직 내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쿵, 쿵, 쿵. 귓가에서 울리는 소리.

금속과 플라스틱이 마찰하는 소리. 낮고 섬뜩하게.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세 개의 검은 형체가 다가왔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그들의 붉은 눈은 오직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왜? 내가 뭘 어쨌다고?

가장 앞선 형체가 팔을 뻗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 그 손가락들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시간이 느려지는 듯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오직 그 검은 손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 손에 잡히면… 안 된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된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몸이 반응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 이런 움직임이 가능하지? 손에 쥔 칼. 차가운 감촉. 팔이 저절로 휘둘러졌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치직-!

무언가를 베는 감촉. 단단하면서도 무른. 푸른 불꽃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검은 팔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잘린 단면에서 푸른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전선! 금속! 저건… 사람이 아니었나?

형체가 뒤로 물러섰다. 붉은 빛이 빠르게 깜빡였다. 다른 두 형체도 잠시 멈칫했다. 그들의 붉은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칼로 향했다. 이 칼… 도대체 뭐지?

내 손. 칼을 쥐고 있다. 푸른 액체가 묻어 있다. 비릿한 오존 냄새. 그녀의 향기와 닮은 듯도 하다. 혼란스럽다. 내가… 어떻게? 나는… 싸울 줄 모르는데. 하지만 몸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열기가 느껴졌다. 손가락은 칼자루를 더욱 단단히 쥐고 있었다.

틈. 아주 짧은 순간. 그들이 주춤하는 순간.

도망쳐! 머릿속이 아니라,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이 바닥을 박찼다. 부서진 문을 향해. 남은 두 형체가 다시 움직였다. 길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몸이 그들의 움직임을 미리 읽은 듯,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어깨가 벽에 부딪혔다. 아프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밖으로! VIP 룸 밖으로 뛰쳐나왔다! 등 뒤에서 금속성의 발소리가 들린다! 클럽 플로어! 소음! 빛! 사람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덮쳐온다! 눈이 부시고 귀가 아프다! 나는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출구를 향해 달렸다. 손에는 여전히 푸른빛을 내는 칼이 들려 있다. 이것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네온 불빛이 터졌다 사라진다. 그녀의 눈빛. 그 로고. 골목길. 빗소리.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왜 도망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달린다. 발이 움직이는 대로.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숨이 차오른다. 등 뒤의 발소리. 앞의 혼돈. 달린다. 이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빗방울. 차가운 입맞춤처럼 뺨에 와 닿는다. 아니, 이것은 입맞춤이 아니다. 이것은 진짜 비다. 클럽 안의 열기와 인공 향기는 저 문 너머에 남겨두고, 나는 차갑고 축축한 현실 속으로 내던져졌다. 공기는 금속과 녹, 그리고 이름 모를 화학약품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아릿하다. 발밑에서는 물이 첨벙거린다. 웅덩이에 비친 네온 불빛이 수면 위에서 조각나 흩어진다. 보랏빛, 녹색빛, 핏빛. 마치 깨진 유리 조각들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혹은, 유화 물감이 제멋대로 번져나간 듯.

심장이 뛴다. 너무 빠르고 강하게. 갈비뼈 안에서 새가 미친 듯이 날갯짓하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뛰지? 아, 도망치고 있구나. 무언가로부터. 무엇이었을까? 어둠 속의 붉은 눈동자들. 부서진 문. 푸른 스파크. 그리고… 내 손. 아직도 무언가를 쥐고 있다. 차갑고 단단한 것. 칼. 손가락이 저절로 그것을 꽉 움켜쥐고 있다. 놓아야 하는데. 무거운데. 하지만 손은 여전히 그것을 놓지 않는다. 마치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달린다. 다리가 멋대로 움직인다. 보도블록 위를, 웅덩이를 가리지 않고. 빗물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 차갑다. 몸이 떨린다. 추워서? 아니면… 두려워서?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에? 골목은 좁고 어둡다. 양옆의 벽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어 위압적이다. 축축한 벽에는 이끼 같은 것이 끼어 있고, 정체 모를 액체가 흘러내린 자국이 얼룩져 있다. 그 위로 AR 그래피티들이 희미하게 떠 있다. 뒤틀린 덩굴, 텅 빈 눈의 해골, 해독 불가능한 기호들. 그리고… 로고. 또 그 로고다. 차가운 금속 질감의 로고가 벽 위에서 희미하게 깜빡인다. 마치 숨겨진 메시지처럼. 왜 자꾸 보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사무실에서 나눠준 싸구려 기념품에 찍혀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니. 모르겠다. 생각하려 하면 머리가 아프다.

머릿속은 소용돌이치는 빛과 소리, 감각의 파편들로 가득하다. 그녀의 눈. 디지털 불꽃 같던 그 눈동자. VIP 룸의 차가운 공기. 그녀의 손길. 내 뉴럴 포트를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 그리고… 욱신거리는 통증. 혹은 고동. 그리고 붉은 눈들. 푸른 액체. 칼날의 섬광. 이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혼돈을 이룬다. 사무실의 풍경이 불쑥 끼어든다. 모니터의 하얀 불빛. 깜빡이는 커서. 김 대리의 굳은 표정. 서류 더미의 먼지 쌓인 냄새. 왜 이런 것들이 떠오르지? 이것은 지금의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 나는 이제 그곳에 없는데. 나는 지금 여기, 이 비 내리는 골목길을 달리고 있는데.

발이 엉킨다. 휘청. 벽에 부딪힌다. 거친 콘크리트 벽의 감촉. 어깨가 아프다. 하지만 몸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 달린다. 마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프로그램된 것처럼. 몸이 가볍다. 이상할 정도로.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드레날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저 앞. 골목 끝 모퉁이. 낡은 가게 쇼윈도우. 불 꺼진 가게 안쪽은 어둡지만, 쇼윈도우의 낡은 비디오 스크린은 켜져 있다. 화면 가득 노이즈가 지글거린다. 검고 흰 점들이 눈보라처럼 흩날린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주 잠깐, 무언가 다른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얀색. 부드러운 곡선. 토끼? 귀를 쫑긋 세운 하얀 토끼의 흐릿한 실루엣. 그것은 화면 노이즈와 뒤섞여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히 토끼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자리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의 미소? 아니, 닮았지만… 뭔가 달랐다. 더 장난스럽고, 더… 기묘한. 화면은 다시 격렬한 노이즈로 뒤덮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충동이 일었다. 명확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나침반 바늘이 특정 방향을 가리키듯, 자연스럽게. 하얀 토끼. 따라가야 해. 저것을. 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 스크린이 있던 방향으로 향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리는 것처럼. 그래, 가자. 저것이 무엇이든. 저것이 이끄는 곳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또 다른 골목. 더 좁고 어둡다. 양쪽 건물 벽이 더 높이 솟아 있어 하늘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타닥타닥, 머리 위 어딘가에 설치된 낡은 방수포를 때리는 소리가 선명하다. 저 멀리, 희미한 빛이 깜빡인다. 홀로그램 광고판인 듯하다. 역시 화면 상태가 좋지 않다. 노이즈가 심하고 색이 바랬다. 하지만 그 깜빡임 속에서, 다시 하얀 형체가 어른거린다. 토끼.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보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앞발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사라진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 빛을 향해. 등 뒤가 서늘하다. 누군가 따라오는 걸까? 빗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내 심장 소리 때문인지, 발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존재감.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시선. 혹은, 저 위, 어두운 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드론의 차가운 눈. 돌아볼 수 없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달린다. 하얀 토끼의 잔상을 쫓아서. 이 미로 같은 골목길 속으로.

길가 노점상 앞을 지난다. 번쩍이는 크롬 의수나 중고 뉴럴 인터페이스 따위를 팔고 있다. 주인인 듯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본다. 그의 눈빛은 무심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그의 가게 앞에 세워진 AR 간판. ‘기억을 팝니다! 꿈을 삽니다!’ 그 글자들이 네온 빛 속에서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진다. 클럽의 홀로그램 댄서처럼, 혹은 사무실 프린터의 에러 메시지처럼.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이제 다른 곳에 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저 하얀 토끼뿐.

웅덩이에 비친 내 얼굴. 빗물에 젖어 번들거린다.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이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있다. 낯설고, 어쩌면 조금은 단단한. 손에 쥔 칼의 감촉이 다시 느껴진다. 차갑고, 확실한 존재감. 이것은 나를 지켜줄까? 아니면 나를 파괴할까?

저 앞, 공중에 떠 있는 작은 드론. 택배용인 듯하다. 그 옆면의 작은 스크린 위에서, 다시 하얀 토끼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훨씬 더 선명하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토끼는 짧게 깜빡이며 고개를 까딱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드론은 방향을 틀어 다른 골목으로 날아갔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드론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이성은 마비된 지 오래다. 남은 것은 오직 본능적인 이끌림뿐. 하얀 토끼가 이끄는 대로. 이 비 내리는 네온의 밤 속으로. 더 깊숙이.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 속으로. 발밑의 물웅덩이가 만들어내는 잔물결처럼, 내 의식도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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