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비룡(漢江飛龍) 제4부(第四部): 운명의 밤
한강비룡(漢江飛龍)
제4부(第四部): 운명의 밤
제1장: 운명의 문턱
폐가의 축축한 하수도 통로를 벗어나 다시 서울의 밤거리로 나왔을 때, 빗줄기는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무거웠다. 이선우와 윤채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복면인이 마지막으로 알려준 궁정동의 특정 주소를 향해 어둠 속을 헤쳐 나아갔다. 주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간간이 지나치는 검은색 관용 차량들과, 높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호화로운 저택들의 불빛만이 이곳이 평범한 동네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눈들이 사방에서 그들을 감시하는 듯한, 숨 막히는 긴장감이 온몸을 옥죄었다.
마침내 약속된 주소 근처, 오래된 은행나무가 버티고 선 인적 드문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코트 대신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취운 선생', 아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며칠간의 고뇌와 피로가 깊게 서려 있었으나, 그 너머에는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강철처럼 서려 있었다.
김재규는 두 사람의 무사한 모습과, 선우가 품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암호 밀서를 확인하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
"무사했군. 시간이 없다. 내 말을 잘 듣게."
그는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으로 차지철의 이름을 명확히 언급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지철에 대한 깊은 경멸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 오만방자한 자가 각하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네. 또한, 자네들이 가진 '징표'의 실체를 그놈이 눈치채고 그것마저 손에 넣는다면... 이 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걸세."
김재규의 눈빛이 선우와 채영을 향했다. 그의 눈빛은 간절하면서도 강렬했다.
"나는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네. 하지만... 만약의 사태란 것이 있지. 최악의 경우,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진실을 증언하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할 이가 필요하다네."
그는 두 사람에게 위험천만한 임무를 부여했다. 바로 안가 내부로 잠입하여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자신의 '신호'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자네들은 안으로 들어가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기다려주게. 소리를 죽이고, 모습을 감추고, 모든 것을 보고 들어야 하네. 어쩌면 자네들이 가진 두루마리의 진실을 뒷받침할 마지막 증거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 기회가 닿는다면 그것을 확보하는 것도 잊지 말게."
선우와 채영은 숨을 삼켰다. 호랑이 굴로 직접 들어가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김재규의 눈빛은 그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김재규는 미리 연락을 취해두었던 듯,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 두 명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두 사람을 이끌었다. 그들은 안가의 삼엄한 경비망을 능숙하게 피해 움직였다. 담장의 사각지대를 이용하고, 정해진 시간에 교대하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마침내 안가 본관 건물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창고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창고 벽에는 교묘하게 위장된 작은 환기구가 있었고, 그곳을 통해 안쪽 연회장의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대기하십시오. 부장님의 신호가 있을 때까지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김재규의 부하는 그 말만 남기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창고 안에는 희미한 먼지 냄새와 함께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선우와 채영은 환기구 앞에 바짝 붙어 안쪽을 살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맛있는 음식과 술이 가득한 연회상이 차려져 있었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내들의 웃음소리와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이면에는 칼날 같은 긴장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운명의 문턱을 넘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숨을 죽이고, 역사의 폭풍이 휘몰아칠 그 순간을 기다렸다.
제2장: 궁정동(宮井洞)의 밤
선우와 채영이 몸을 숨긴 곳은 연회장과 연결된 좁고 먼지 쌓인 다락방의 구석이었다. 낡은 나무 벽 틈새와 교묘하게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그들은 바로 아래 펼쳐지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들의 비밀스러운 연회를 숨죽여 지켜볼 수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 차려진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최고급 양주와 와인이 넘실거리는 크리스탈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 권력자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한쪽에서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젊은 여가수가 애절한 목소리로 유행가를 부르고 있었고, 아름다운 용모의 젊은 여성이 시중을 들며 술을 따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화려하고 풍족했지만, 그 이면에는 기묘한 퇴폐와 위태로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테이블 상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앉아 있었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절대 권력자 특유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그의 옆에는 우람한 체구의 차지철 경호실장이 거의 자리를 독차지하듯 앉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삭이며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름지고 오만했으며, 다른 참석자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맞은편에는 김계원 비서실장이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술잔을 비우고 있었고, 그 옆에는 오늘 밤 비극의 주인공이 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차지철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첨하듯 말하면서도 교묘하게 김재규를 깎아내렸다.
"각하! 요즘 세상 물정 모르는 자들이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는 모양입니다만, 저 차지철만 믿으시면 아무 걱정 없습니다! 이런 자리에 좀스러운 정보부의 굼뜬 개까지 부르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의 노골적인 조롱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순간 싸늘해졌다. 김계원은 당황하여 눈치를 살폈고, 노래하던 여가수의 목소리마저 잠시 떨리는 듯했다.
김재규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잔에 담긴 술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얼굴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술잔을 쥔 손등에 희미하게 돋아난 힘줄과, 순간 차갑게 빛났다가 사라지는 눈빛을 숨어있는 선우는 똑똑히 보았다. 김재규는 잔을 내려놓고 나직하게 응수했다.
"개는 주인을 알아보는 법입니다만, 여우는 때로 주인의 닭을 탐내는 법이지요, 차 실장."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서릿발 같은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뭣들 하는 겐가! 오늘은 즐거운 자리야!" 박정희 대통령이 불편한 기색으로 술잔을 내리치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감정의 골과 권력 암투는 선명하게 드러난 후였다. 선우는 차지철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저 자가 바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원흉이란 말인가!
연회는 어색하고 위태로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다. 아름다운 여가수의 노랫가락은 아름다웠으나, 그 속에는 깊은 슬픔과 체념이 서려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술에 취해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차지철과 잔을 부딪혔고, 차지철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큰 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려 했다. 김재규는 그저 말없이 술잔만 비울 뿐이었다.
얼마 후, 김재규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각하."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연회장을 나섰다. 선우와 채영은 숨을 죽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시간이 흐르고, 김재규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가시고 창백해 보였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전의 피곤함이나 고뇌의 흔적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건 자의 비장한 평온함, 그리고 목표물을 노리는 맹수와 같은 냉엄한 집중력만이 느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다시 술잔을 채웠다.
연회장의 공기는 이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느껴졌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차지철조차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잠시 떠드는 것을 멈추고 김재규를 힐끗거렸다. 박정희 대통령만이 술에 취해 흐릿한 눈으로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락방의 어둠 속에서, 선우와 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곧, 역사의 흐름을 바꿀 폭풍이 휘몰아칠 터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숨 막히는 폭풍 전야였다.
제3장: 혈투(血鬪), 그리고 진실
연회장의 공기를 가르며 김재규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차지철! 네놈의 오만방자함도 오늘까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몸을 날렸다. 연회석의 술상(酒床)을 발로 걷어차 온갖 술병과 접시들이 차지철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것은 단순한 기습이 아니었다. 그 혼란 속에서 김재규의 신형은 이미 유령처럼 차지철의 지척까지 파고든 후였다! 그는 정보부 수장의 냉철함 대신, 오랜 세월 숨겨왔던 무림 고수 '취운(醉雲)'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기운이 담긴 장풍(掌風)이 터져 나왔다.
"흥! 쥐새끼 같은 수작을!"
차지철은 날아드는 술병과 접시들을 귀찮다는 듯 손으로 쳐내며 김재규의 장풍을 비웃듯 받아냈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지철은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났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히려 그의 온몸에서 검붉고 사악한 기운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흑룡강기(黑龍罡氣)'! 그의 주위 공기가 뒤틀리고, 연회장의 등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우람한 체구가 더욱 팽창하는 듯했고, 그의 눈빛은 살기로 이글거렸다.
"네놈의 녹슨 무예로 감히 이 몸에게 덤비다니, 가소롭구나! 오늘 네놈의 목을 쳐서 각하께 충성을 보이겠다!"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을 흘깃 보며 외치고는, 김재규를 향해 호랑이가 먹이를 덮치듯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다. 흑룡강기가 실린 그의 권격(拳擊)은 허공을 가르는 소리부터 달랐고, 그 위력은 바위라도 부술 듯했다. 김재규는 정면 대결을 피하며 유운신법(流雲身法)처럼 부드럽게 그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는 차지철의 힘이 강맹(强猛)한 만큼 빈틈 또한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날렵하게 움직이며 차지철의 관절이나 옆구리 같은 약점을 노려 짧고 예리한 지법(指法)이나 권법(拳法)을 날렸다. 마치 숙련된 사냥꾼이 거대한 멧돼지를 상대하듯, 끈질기고 교묘하게 싸움을 이어갔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두 거물의 격투 여파로 값비싼 집기들이 부서져 나뒹굴었고, 비명 소리와 파열음이 뒤섞였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벽 구석에 납작 엎드려 있었고, 여가수와 모델은 서로 부둥켜안고 떨고 있을 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만이 술에 취한 듯, 혹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여인의 어깨에 기댄 채 흐릿한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놈이!"
숨어서 지켜보던 선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원수와도 같은 차지철이 눈앞에서 날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취운 선생', 아니 김재규가 점차 밀리는 것이 보였다. 차지철의 흑룡강기는 너무나 강했고, 김재규의 옷자락은 이미 여러 군데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사저!"
선우가 외치자, 채영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은신처에서 뛰쳐나왔다!
"웬 놈들이냐!" 차지철이 잠시 놀라 외쳤다.
채영의 검이 먼저 섬광처럼 날아갔다. 그녀의 유엽검(柳葉劍)은 차지철의 하체와 옆구리를 노리며 현란하게 펼쳐졌다. 빙심결(氷心訣)의 차가운 기운이 그의 흑룡강기를 미미하게나마 교란시켰다. 선우 역시 아버지의 검을 뽑아 들고 청랑검법(靑狼劍法)을 펼치며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검에는 복수심과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는 필살의 각오로 '낭아일섬(狼牙一閃)'을 차지철의 가슴팍을 향해 찔러 넣었다!
"감히 버러지 같은 것들이!"
차지철은 격노했다. 그는 두 젊은이의 협공에 잠시 당황했지만, 절대 고수로서의 위엄은 여전했다. 그는 왼손으로 채영의 검을 쳐내고 오른발로 선우의 검을 걷어차며 포효했다. 그 와중에 그는 김재규를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고작 중정부장 김재규 따위가 애송이들까지 끌어들여 이 몸을 상대하려 들어? 네놈의 정보부도 이제 끝이다!"
그 순간, 선우와 채영은 얼어붙었다. 중정부장... 김재규? 자신들을 이끌어주고 고뇌를 토로하던 '취운 선생'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진실 앞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눈앞의 적은 그들의 혼란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차지철의 반격은 더욱 거세졌다. 그는 두 젊은이를 거의 장난감 다루듯 몰아붙였고, 김재규에게 다시 집중하여 결정타를 날리려 했다. 김재규는 이미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금밖에 없다!'
김재규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차지철이 선우와 채영을 상대하느라 잠시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모든 내공(內功)과 정신력을 끌어모아 오른손 검지(劍指) 끝에 집중시켰다. 그의 손끝이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며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청랑의 비기(秘技)이자, 그의 모든 것을 건 마지막 수.
"파심지(破心指)!"
김재규의 입에서 나직하지만 강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끝에서 응축된 기운이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섬광이 되어, 차지철의 흑룡강기 방어막 중 가장 취약한 부분, 그의 심장 부근 혈맥을 향해 정확히 쏘아져 나갔다!
"크... 크아아악!"
강철 같은 방어력을 자랑하던 차지철의 입에서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파심지의 기운은 그의 흑룡강기를 깨뜨리고 심맥(心脈)을 파고들어 그의 생명력을 급속도로 잠식하고 있었다. 그의 온몸을 감싸던 검붉은 강기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더니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차지철은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다.
하지만 파심지를 사용한 김재규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온몸의 기력이 소진된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검붉은 피를 쏟아냈다.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였다. 파심지에 맞아 쓰러지던 차지철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그는 극도의 고통과 분노 속에서 통제력을 잃은 흑룡강기를 사방으로 폭주시켰다! 그의 손에서 검붉은 기운 덩어리가 터져 나오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어이쿠!"
이 모든 사태를 술에 취해 멍하니 지켜보던 박정희 대통령. 그는 옆에 있던 여가수의 품에 안겨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차지철이 폭주시킨 흑룡강기의 일부가 그의 등 뒤를 강타했다! 아무런 방비도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짧은 신음과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의 눈은 허공을 향한 채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최후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허무했다. 연회장의 절대 권력자는 이렇게, 부하의 마지막 광란에 휩쓸려 부수적으로 스러져 간 것이다.
선우와 채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차지철은 쓰러져 숨을 거두었고, 박정희 대통령 역시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김재규는 벽에 기댄 채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연회장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오직 김재규의 거친 숨소리와, 겁에 질린 생존자들의 흐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은, 이제 막 그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제4장: 운명의 새벽
연회장은 처참한 혈향(血香)과 정적(靜寂)으로 가득 찼다. 화려했던 샹들리에 불빛 아래, 싸늘하게 식어가는 두 구의 시신과, 벽에 기댄 채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년 사내.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을 목격하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몇몇 사람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충격적인 밤은 이렇게, 예고 없이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었고, 살아남은 여가수와 모델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오직 벽에 기대앉은 김재규의 거친 숨소리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치명적인 내상(內傷)을 입고 있었고, 의식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어르신!" "선생님!"
선우와 채영은 넋을 잃고 서 있다가, 김재규의 상태를 보고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취운 선생', 아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었다.
김재규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듯, 선우가 품 안에 간직하고 있을 암호 두루마리를 향해 힘겹게 손짓했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을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후회, 안도, 그리고 두 젊은이에게 거는 마지막 기대감.
"모든 것은... 내가 안고 가겠네. 이제... 그대들의 시간이군."
그의 시선이 두루마리가 있을 선우의 품을 향했다.
"이 두루마리... 그리고 이 나라의 미래를... 그대들에게 맡기겠네. 부디... 정의(正義)를... 바로 세워주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의 눈은 천천히 감겼고, 고개가 옆으로 떨구어졌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혹은 깊은 체념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그가 짊어져야 할 역사의 무게는 이제 잠시 그의 의식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김재규가 의식을 잃기 직전 보냈던 것일까, 혹은 미리 약속된 신호였을까. 갑자기 연회장 바깥 복도 쪽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동시에 안가의 다른 구역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져 있던 김계원 비서실장과 경호 요원들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쏠렸다.
"지금입니다! 이쪽으로!"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복면의 사내가 선우와 채영의 팔을 잡아끌며 외쳤다. 그는 김재규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듯했다.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연회장 구석, 이전에 들어왔던 통로와는 다른 벽 쪽으로 이끌었다. 그가 벽의 특정 부분을 누르자, 그림처럼 걸려 있던 낡은 족자 뒤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비밀 통로가 소리 없이 열렸다!
선우와 채영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 김재규의 마지막 모습과 그의 유언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확인한 후, 복면인을 따라 어둡고 좁은 통로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는 김계원의 다급한 외침과 몰려드는 발소리, 그리고 안가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혼란스러운 소음들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비밀 통로는 길고 복잡했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을까. 마침내 통로 끝에서 차가운 새벽 공기가 느껴졌다. 그들이 빠져나온 곳은 궁정동 안가의 높은 담벼락에서 한참 떨어진, 인적 없는 후미진 골목길이었다. 복면인은 두 사람의 무사를 확인하자마자, "몸조심하십시오. 이것이 선생의 마지막 배려입니다." 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선우와 채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멀리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고, 도시 전체가 불안한 기운으로 술렁이는 듯했다. 비는 그쳤지만, 새벽 공기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흙먼지와 피로 얼룩진 옷, 퀭한 눈,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
운명의 밤은 끝났다. 차지철도, 박정희 대통령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김재규는 쓰러졌고, 그들을 쫓던 흑룡단과 백호상단의 추격도 잠시 끊겼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더욱 길고 어두운 새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안에는 대한민국을 뒤흔들 '사직의 징표'가 있었고, 가슴에는 '나라의 미래'와 '정의'라는 무거운 짐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곧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고, 온 세상이 그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 터였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동 트기 전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제4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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