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잔상 Act 3: 무의 잔재 #2
깜빡이는 잔상 (Flickering Afterimage)
Act 3: 무의 잔재 (Remnants of Nothing)
Episode 2: 텅 빈 껍데기 (The Hollow Shell)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고, 나를 둘러쌌던 바깥세상의 소음은 벽 너머로 아스라이 멀어진다. 갈라의 현란했던 빛들도 함께 희미해져, 이제는 어둡고 고요한 정적만이 공간을 감돈다. 익숙한 먼지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발바닥 아래, 두껍고 부드러운 카펫의 감촉이 낯설게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 내 몸의 일부였던 화려한 드레스의 무게와 빛깔이 사라진 자리는 텅 빈 듯 허전하다. 팔다리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느슨하게 늘어져 있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조차 희미하다. 몸은 그저 희미한 관성에 이끌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거실 저편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대부분 전원이 꺼진 검은 화면들 사이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하나가 간신히 빛을 내고 있다. 유리창에는 밤새 내리는 비가 얼룩처럼 번져 있다. 빗방울들이 창 표면에 부딪혀 동그랗게 맺혔다가, 서로 얽히며 제멋대로 길고 불규칙한 선을 그리며 아래로 흘러내린다. 쉴 새 없이 새로운 형태가 태어나고 소멸하는 느리고 조용한 풍경. 방 안에는 아주 낮은 소리들만이 존재한다. 창밖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빗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냉장고인지 환풍기인지 모를 낮은 기계 작동음. 모든 것이 느리고, 멀게만 느껴진다.
메모리 포지. 신경 인터페이스 콘솔. 저기 있다. 가야 한다. 다음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보다는,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당연하게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막연한 이끌림이 나를 움직인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한다. 의자에 몸을 앉히자,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이 옷을 뚫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와 닿는다. 손을 뻗어 콘솔 표면을 만진다. 매끄럽고 서늘한 감촉. 전원 버튼을 누르자 약한 진동이 손끝을 통해 몸으로 전달된다. 화면이 켜지고, 수많은 기호들과 빛의 점멸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 속에서 아주 오래된 기억 조각 하나를 찾아낸다. 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감도는 부드러운 색깔. 따뜻했던 느낌. 아, 어릴 적의 그 멜로디.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선택한다.
메모리 포지를 활성화시킨다. 낮은 기계음이 시작된다. 윙-. 화면에 검은 입자들이 천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그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무지갯빛 안개 같은 것이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형태를 갖출 듯 말 듯, 희미한 빛과 함께 아주 약한 소리가 느껴진다. 멜로디의 첫 음절인가? 잡힐 듯 말 듯,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련하게… 아. 화면 속 안개가 더 이상 퍼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서지기 시작한다. 격렬함 없이, 그저 조용히. 색깔은 힘을 잃고 검은 입자 속으로 스러져간다. 소리도 함께. 화면은 다시 완전한 검은색으로 돌아가고, 그 위로 희미한 지직거림만이 남는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의미 없는 노이즈. 지직. 지직.
아니다. 다시. 무언가 잘못되었을 뿐이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더듬는다. 다른 기억 조각. 어제 본 거리의 풍경? 아니면 더 오래된 슬픔? 무엇이든 좋다. 제발, 무엇이든 떠올라야 한다. 하지만 화면은 여전히 검다. 지직거리는 소리는 더욱 희미해져,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완전한 침묵. 완전한 어둠. 손이 떨린다. 가슴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다. 숨을 크게 쉬어보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콘솔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 하지만 그럴 힘조차 없다. 손이 콘솔에서 힘없이 떨어진다.
손바닥의 감촉. 약간 거칠다. 붉은 기운이 도는 것 같기도 하다. 아픔은 없다. 그냥, 붉다. 콘솔 화면은 여전히 검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멈췄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한다. 테이블. 그 위에 남은 희미한 얼룩. 어제는 분명 없었는데. 언제 생긴 걸까. 동그랗고, 연한 갈색이고, 표면은 약간 끈적해 보인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본다. 지워지지 않는다. 표면의 일부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다. 가장자리는 불규칙하게 번져 있고,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그 색깔이 아주 미묘하게 달라 보인다. 어떤 때는 푸른빛이 도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누런빛을 띤다. 표면은 아주 미세하게 울퉁불퉁해서, 손톱으로 살짝 긁으면 아주 작은 가루 같은 것이 묻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긁지는 않는다. 그냥 바라본다. 동그랗고, 희미하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은 배경처럼 흐릿해지고, 오직 이 작은 얼룩의 세밀한 질감과 색깔, 형태만이 내 의식의 전부를 차지한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고, 나는 그저 얼룩을, 얼룩만을 본다.
…윙-. 아주 약한 기계 작동음이 다시 들린다. 그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든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임플란트 보관함으로 향한다. 뚜껑을 연다. 그 안에 늘어선 익숙한 모양의 임플란트들. 손이 귀 뒤로 올라간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피부 위를 더듬는다. 머리카락 몇 올이 손가락 사이로 스친다. 조금 더듬어 내려가자, 피부 아래 딱딱하고 약간 돌출된 부분이 만져진다. 신경 포트. 그리고 그 위에 단단히 고정된 임플란트.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것을 잡는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살짝 비틀자,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임플란트가 포트에서 분리된다. 아주 미세한 진동이 두개골 안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뽑아낸 임플란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작고, 가볍고, 차갑다. 표면의 복잡한 문양들이 희미한 빛 속에서 보인다. 이것. 이것이 없으면 나는… 예전 일이 떠오른다. 중요한 컬렉터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식은땀을 흘렸던 순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대화의 맥락을 놓쳐 바보처럼 웃기만 했던 오후. 그때마다 나를 구해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을 연결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자신감 넘치고, 유창하고, 모든 것을 아는 사람. 기억의 빈틈을 메우고, 나를 사회적인 존재로 기능하게 해 주었던 가면들. 이것들이 없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이제는… 손을 기울여 그것을 보관함 안으로 떨어뜨린다. 가벼운 금속이 플라스틱 바닥에 부딪히는, 텅 빈 소리가 난다. 나머지 임플란트들도 마찬가지로, 거의 생각 없이,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제거하여 보관함에 던져 넣는다. 딸깍, 툭. 딸깍, 툭.
모든 것이 제거되었다. 머릿속이… 비었다. 텅 비었다. 아니, 완전히 빈 것은 아니다. 백색 소음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쉬이이-.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고장 난 기계 소리 같기도 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음. 그것이 이제 내 생각의 배경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생각 자체가 사라지고 이 소음만이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소리들 - 빗소리, 희미한 기계음 - 은 여전히 들리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나와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소리처럼,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세상이 뿌옇고 흐릿하게 보인다. 모든 것이 느리고, 무겁게 느껴진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방 안을 걷는다. 발걸음이 바닥에 닿는 감촉이 느껴진다. 카펫의 부드러움, 마룻바닥의 단단함. 벽에 기대어 선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진다. 그냥, 차갑다. 그뿐이다.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 윤곽선만 희미하게 흔들린다. 누구지? 저것이 나인가? 알 수 없다. 그저 희미한 형체일 뿐이다. 움직이지 않고 창밖의 비를 보고 있는, 낯선 형체.
테이블 위를 본다. 아까 보았던 얼룩이 그대로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얼룩에 시선이 머물지 않는다. 그냥, 테이블 위의 여러 무늬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옆에 놓인 임플란트 보관함. 그리고 내일 사용할 임플란트들. 내일. 그래, 내일이 있다. 내일은 이것들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내일 사용할 임플란트 세 개를 집어든다. 표면을 닦는다.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늘어놓는다. 하나. 둘. 셋. 일정한 간격. 완벽한 배열. 손가락이 기계의 부품처럼 정확하고 망설임 없이 움직인다. 왜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마치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임플란트들을 제자리에 놓고, 침대로 향한다. 발걸음은 여전히 느리고, 어떤 목적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침대라는 목적지를 향해 움직일 뿐이다. 침대에 몸을 눕힌다. 시트가 몸을 감싸는 감촉이 차갑고 매끄럽다. 천장을 본다. 하얗다. 아무 무늬도, 얼룩도 없이 그냥 끝없이 하얗다. 눈을 깜빡인다. 변함없는 하얀 천장.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유리창 너머로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빗방울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며 유리 표면을 타고 흘러내린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빗소리가 아주 약하게, 거의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멀리서 들려온다. 머릿속의 백색 소음은 여전하다. 쉬이이-.
입술이 움직인다. 아주 미세하게.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공기가 희미하게 떨리며 목구멍을 스쳐 나온다. 어떤 높낮이도,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그저 마른 나뭇잎이 바닥을 구르는 듯한, 아주 평탄하고 건조한 소리로 내일을 이야기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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