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
<사이렌>
1. 심 기사 (3층 대성 정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작업대 옆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던 심 기사는 매캐한 냄새와 희미한 소란에 눈을 떴다. 복도 쪽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치는 것 같기도 했다. ‘뭔 일이여?’ 그는 부스스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뿌연 연기가 밤공기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래층에서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평생을 바친 이 공장, 저 낡은 기계들. 불이라도 나면… 그는 황급히 작업복을 꿰어 입고 문 쪽으로 향했다. 제발,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아래층 그 시끄러운 술집 놈들이 또 뭔 사고를 친 건 아닌가 몰라. 불안감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었다.
2. 김시우 (1층 바 ‘그루브 을지로’ 사장)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혼자 남아 마감 정리를 하던 김시우는 창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그는 황급히 가게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바로 옆 건물 입구 쪽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두어 사람이 당황한 듯 서성이고 있었다. ‘젠장, 하필 오늘.’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가게에 불똥이라도 튀면 큰일이었다. 비싼 오디오 장비며 희귀 LP 판들. 그는 일단 가게 안의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야 할지, 아니면 나가서 상황을 봐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좁은 골목 안으로 곧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그의 세련된 가게 내부를 어지럽게 비추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3. 린 (인근 공장 베트남 노동자)
야간 작업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어 숙소로 돌아가던 린은 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와 소란에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한쪽 골목 입구로 몰려 있었고, 희뿌연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다급한 한국말은 그에게 소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 사고? 혹시 위험한 건 아닐까? 타국에서의 예기치 못한 재난은 그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는 혹시라도 불똥이 튀거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까 싶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 멀찍이 골목을 우회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은 그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이곳을 지나가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4. 이 실장 (건물 관리인)
새벽 1시 반, 잠자리에 막 들려던 이 실장은 다급한 연락을 받고 옷만 겨우 걸친 채 건물로 달려왔다. 다행히 불은 1층 복도 전선 합선으로 인한 작은 화재였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에 의해 금방 진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현장은 물과 소화 분말, 그리고 어수선한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온 심 기사는 잔뜩 흥분해서 “아래층 술집 때문에 이게 뭐냐”며 언성을 높였고, 바 사장 김시우는 “우리 가게랑은 상관없다”며 날카롭게 받아쳤다. 다른 세입자들도 불안한 얼굴로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 실장은 소방관과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흥분한 세입자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내일 아침부터 또 얼마나 시달릴까.’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잔해 속에서 타다 남은 전선 가닥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5. 다시, 새벽
소방차와 경찰차가 떠나고, 구경꾼들도 흩어졌다.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을지로의 골목은 다시 깊은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에는 방금 전의 사건이 남긴 미세한 균열과 불안의 흔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심 기사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일 테고, 김시우는 가게 피해와 이미지 손상을 걱정할 것이다. 린은 불안한 마음으로 뒤척이며 고향 꿈을 꿀지도 몰랐고, 이 실장은 앞으로 처리해야 할 골치 아픈 문제들을 떠올리며 밤을 지새울 터였다. 작은 불씨 하나가 던진 파문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모양과 무게로 밤새 이어지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멎었지만, 그들이 듣는 마음속 경보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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