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이력서>

몇 주 전, 을지로의 그 번잡한 술집에서 있었던 회식 이후, 권 대리의 일상은 겉보기에는 똑같이 흘러갔다. 그는 여전히 아침이면 지옥철에 몸을 실었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커피를 내렸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끝없이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는 무언가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무심히 넘겼을 부장의 아재 개그나 김 차장의 과장된 제스처가 이제는 기묘하게 공허하게 느껴졌다. 동료들의 얼굴 위로, 그날 밤 술에 취해 붉어졌던, 어딘가 필사적이면서도 지쳐 보이던 그 표정들이 겹쳐 보일 때가 있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가 맡은 역할에 충실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막이 내리고 분장을 지우면 결국 똑같이 지친 얼굴들만 남아있을 것 같은.

오후의 팀 회의는 지루함의 절정이었다. 박 부장은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대부분은 지난 회의 때 했던 말의 반복이거나 핵심 없는 이야기였다. 권 대리는 보고서에 오탈자라도 찾는 심정으로 부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저 열정적인 말투와 자신감은 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문득, 회식 자리에서 ‘열정’과 ‘헌신’을 외치던 부장의 취한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회의가 끝나자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 그는 답답한 마음에 잠시 사무실을 나와 을지로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찬 기운이 남은 초봄의 공기가 그나마 머리를 식혀주었다. 낡은 공구상들 사이로 새로 생긴 듯한 카페의 통유리창 안에는 세련된 차림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몇 주 전 회식을 했던 그 식당 근처를 지나치며, 그날 밤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떠올렸다. 부품처럼 느껴졌던 동료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그 막막함.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질문은 계속 맴돌았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그는 옆 부서의 입사 동기와 마주쳤다. 동기는 피곤에 절은 얼굴로 하소연했다. “아, 진짜 때려치우고 싶다. 근데 막상 나가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권 대리는 “다들 그렇지 뭐” 하고 애써 웃어 보였지만, 동기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꾸역꾸역 다니는 거겠지. 하지만… 정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자리에 돌아온 권 대리는 한참 동안 모니터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방금 전 회의 내용을 정리하라는 메일이 새로 도착해 있었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을 클릭하려다, 문득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홀린 듯이, 탐색기 창을 열어 아주 깊숙한 폴더 안에 숨겨두었던 파일을 찾아 더블클릭했다. ‘권대리_이력서_최종.hwp’. 파일 정보에는 ‘수정한 날짜: 2022-03-15’라고 찍혀 있었다. 벌써 3년 전이었다. 그때도 비슷한 회의감 속에서 이직을 꿈꿨지만, 결국 서류 몇 군데 내보고 흐지부지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걸 다시 열어본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아주 천천히,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 아래, ‘경력 사항’ 섹션에 커서를 옮겼다. [2023.04 ~ 현재] XX기획 영업 2팀 대리 - 주요 업무: … 그는 지난 3년간 자신이 해왔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막상 쓰려니 막막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주 작은 불씨 같은 것이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권 대리! 아까 회의록 정리 부탁한 거, 오늘 중으로 가능하지?”

등 뒤에서 박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 대리는 재빨리 이력서 창을 작업 표시줄 아래로 내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부장님. 지금 하고 있습니다.”

부장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권 대리는 다시 숨겨두었던 이력서 창을 화면에 띄웠다. 이 이력서가 완성될 수 있을지, 완성된다고 해도 어디론가 향하는 문이 되어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또다시 흐지부지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아주 작은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행위였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모니터를 향한 시선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희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분주한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지만, 그는 잠시 그 소리를 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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