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생각>

 <흐르는 생각>

햇살이… 따갑네. 아직 봄인데 여름 볕 같아. 썬크림을 발랐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어제 일도 깜빡깜빡하는데 뭘. 저기 저 카페, 원래 저 자리가 뭐였더라… 아, 김 씨 빵집. 팥빵이 참 맛있었지. 우리 손주 녀석이 어릴 때 저 집 팥빵만 찾았는데. 그 녀석도 이젠 다 커서 제 앞가림한다고 바쁘고. 빵집 김 씨는 어디로 갔을까. 죽었나? 하긴, 나도 이제 갈 날이 머지않았는데.

(빵 냄새 대신 커피 냄새. 씁쓸한 냄새. 젊은 애들은 저런 걸 왜 마시는지. 시끄러운 음악 소리. 쿵짝쿵짝. 귀청 떨어지겠네.)

길 건너 저 영감, 오늘도 저러고 있네. 쯧쯧.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맨날 쓰레기통만 뒤지고 다니는지. 팔자도 기구하지. 그래도 저렇게라도 살아있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살아있다는 거, 별거 있나. 숨 쉬고, 밥 먹고, 가끔 이렇게 햇볕 쬐고…

(자동차 경적 소리. 빵! 아이고, 놀래라.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이러다 큰일 나.)

여기는 그래도 좀 조용하네. 철공소 골목. 쇠 깎는 소리, 망치 두드리는 소리. 정겹지. 우리 영감도 저런 소리 속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무뚝뚝해도 손은 참 야무졌지. 저녁이면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들어와서는… 에휴, 먼저 간 사람이 속 편해. 남은 사람만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기름 냄새. 쇠 냄새. 익숙한 냄새. 눈앞이 잠깐 뿌옇네. 기운이 없나.)

저기 저 애들은 또 무슨 말을 저리 시끄럽게 하나. 우리나라 말 같지도 않은데. 베트남? 필리핀? 하긴 뭐, 요즘은 어딜 가나 외국 사람들이 많으니.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세상 참 많이 변했어. 저 아이들도 돈 벌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이 많겠지. 집 생각도 날 테고. 부모님 보고 싶을 테고.

(갑자기 매캐한 냄새. 용접하는 냄새인가. 콜록콜록.)

어머, 저기 저 불빛. 번쩍번쩍. 예쁘네. 최 씨네 가게 불빛인가? 아니지, 최 씨 가게는 저쪽인데. 요즘은 저런 희한한 불빛들이 많아. 정신 사납게. 우리 영감이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쓸데없이 전기만 축낸다’고 했겠지. 그 양반 잔소리도 이젠 다 그립네.

(다리가 아프다. 좀 쉬었다 가야지. 저기 벤치에 앉을까.)

벤치에 앉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잘 보이네.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뛰다시피 걸어가는 아가씨.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어디 아픈가. 회사 다니는 게 힘들지, 암. 우리 아들도 맨날 야근이다 뭐다… 전화 한 통 하기도 힘들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사는 게 뭔지.

(바람이 분다. 어디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약 냄새인가? 바로 앞에 약국이 있네. 평화 약국. 저기도 참 오래됐지. 저 약사 양반도 많이 늙었네. 나처럼.)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다. 슬슬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저녁은 또 뭘 해 먹나. 혼자 먹는 밥은 맛도 없고. 그래도 챙겨 먹어야지. 안 그러면 병나. 병나면… 아휴, 생각하기도 싫다.

(다시 골목길. 아까 그 고철 더미, 그대로 있네. 오늘은 별로 안 빛나 보이네. 어제 그 아가씨는 왜 그걸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까.)

집 다 와 간다. 저기 저 감나무. 올해도 감이 열리려나. 작년에는 까치밥도 안 남기고 다 따갔는데. 너무 오래 살았나 봐. 기억만 자꾸 쌓여서 무겁기만 하고. 그래도… 그래도 감꽃 피면 예쁘겠지. 그거 볼 낙이라도 있어야지.

(현관문 열쇠. 주머니 어디에 넣었더라. 아이고, 여기 있네. 철컥.)

집. 조용하다. 혼자 사는 집은 너무 조용해서 탈이야. 영감 사진이나 한번 닦아줘야겠다. 사진 속 당신은 아직 젊네. 나만 이렇게 늙었지. 바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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