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마감 후>

등장인물:

  • 선배: 20대 중반 여성. 이곳에서 일한 지 좀 되었다. 다소 지쳐 보이고 냉소적이다. (어쩌면 <얼룩>의 소희일 수도 있다.)

  • 후배: 20대 초반 여성.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은 희망 혹은 순진함이 남아 있다.

시간: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장소: 을지로 골목 안, 이제 막 영업을 마친 바(Bar) 혹은 카페 내부.

(텅 빈 가게 안. 테이블 위에는 빈 잔과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 선배는 바닥을 쓸고 있고, 후배는 컵을 닦고 있다. 설거지하는 물소리, 빗자루질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후배: (컵을 닦으며) 아, 진짜 오늘 진상 손님 대박이었어요. 그렇죠, 언니?

선배: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고) 늘 있는 일이잖아. 새삼스럽게.

후배: 아니, 그래도 자기가 뭘 주문했는지도 기억 못 하고 계속 딴 거 달라고 우기는데… 진짜 어이가 없어서.

선배: 그러려니 해. 술 들어가면 다들 제정신 아니니까.

후배: 하긴… 그래도 너무 피곤해요. 발목 나갈 것 같아요.

선배: (피식 웃으며) 그건 일주일만 더 해봐. 발목이 아니라 영혼이 나갈 테니.

후배: 에이, 언니도 참.

(잠시 침묵. 설거지 소리만 들린다.)

후배: 근데 언니, 아까 그… 사진 엄청 찍던 남자 손님 있잖아요. 거의 뭐 작품 사진 찍는 줄.

선배: 아, 그 비니 쓴 남자? 맨날 와서 저래. 인스타에 올리려고 그러는 거겠지. ‘#을지로갬성’ 뭐 이런 거 달아서.

후배: 푸흐흐. 그래도 신기하지 않아요? 이런 낡은 골목에 뭐가 좋다고 이렇게들 찾아오는지.

선배: 글쎄. 자기들이 뭔가 특별한 걸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남들은 모르는 자기만의 아지트 뭐 그런 거. 근데 사실은 다 똑같은 프랜차이즈 커피 마시고, 똑같은 음악 듣고, 똑같은 사진 찍어서 자랑하는 건데.

후배: … 그렇게 말하니까 좀 그렇네요.

선배: (바닥 쓸기를 마치고 쓰레받기를 들며) 뭐가?

후배: 아니… 그냥… 저도 처음 여기 와서 일할 때 되게 설렜거든요. 뭔가 되게 ‘힙’하고, 특별한 곳 같고. 여기서 일하면 저도 뭔가 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선배: (쓰레기를 봉투에 담으며)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그냥 시급 받고 커피 나르고 설거지하는 거지. 똑같아. 강남이나 여기나.

후배: 그래도… 그래도 여긴 좀 다르잖아요. 뭔가… 날것의 느낌 같은 거.

선배: 날것? (헛웃음을 친다) 그놈의 날것. 먼지 날리고, 하수구 냄새나고, 밤에는 시끄러워서 위층 공방 아저씨 맨날 내려오고. 이게 날것이면 난 그냥 익은 거 할란다.

(다시 침묵. 선배는 쓰레기 봉투를 묶고, 후배는 마지막 컵을 헹군다.)

후배: 언니는… 계속 여기서 일하실 거예요?

선배: (잠시 동작을 멈춘다) … 글쎄. 모르지, 뭐. 당장은 딱히 갈 데도 없고.

후배: 저는… 돈 좀 모아서… 내년에는 꼭 복학하려고요. 디자인 공부 다시 하고 싶어요.

선배: (표정 없이) 그래. 잘 생각했네. 여긴 너 같은 애가 오래 있을 곳 못 돼.

후배: 언니는요? 언니도 원래 하고 싶었던 거 있으셨잖아요.

선배: (시선을 피하며) … 됐어. 옛날 얘기해서 뭐 해. 자, 마저 정리나 하자. 피곤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 맡은 구역의 청소를 마무리한다. 가게 안의 불이 하나씩 꺼지고, 마지막으로 입구 쪽 등만 남는다.)

후배: 언니, 먼저 가세요. 제가 문 잠글게요.

선배: 그래. 내일 보자. 너무 늦게 들어가지 말고.

후배: 네! 언니도 조심히 가세요!

(선배가 먼저 문을 열고 나선다. 후배는 혼자 남아 마지막 점검을 한다. 텅 빈 가게 안, 테이블 위에 반사되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후배는 잠시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이내 전등 스위치를 내린다. ‘철컥’하고 문 잠그는 소리가 좁은 골목 안으로 짧게 울린다. 그녀는 잠시 어둠 속에 서 있다가, 선배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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