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잔상 Act 2: 균열의 거울 #2

 

깜빡이는 잔상 (Flickering Afterimage)

Act 2: 균열의 거울 (Fractured Mirror)

Episode 2: 부재의 메아리 (Echoes of Absence)

밤은 유리창을 타고 흘렀다. 거대한 통유리 위로 빗물이 미끄러지며 바깥세상의 불빛들을 길고 흐릿한 무지개처럼 번지게 했다. 토독, 토독. 일정한 리듬의 빗소리가 넓고 텅 빈 아파트 안을 감돌았다. 세련된 가구들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고, 차가운 금속과 유리의 표면에서 빛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벽면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는 마치 불안정한 심장 박동처럼, 간헐적으로 희미한 푸른빛을 깜빡이며 공간에 생명 없는 움직임을 더했다. 소라는 소파 깊숙이, 거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 빛과 물방울이 뒤섞여 춤추는 유리 표면 어딘가에 흐릿하게 머물렀다.

그 강가. 그래, 그날의 강가였다.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햇살의 따가움, 거의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강렬한 빛. 눈을 감아도 붉은 잔상이 어른거렸다. 공기는 맑았고, 물비린내와 젖은 흙냄새, 그리고 싱그러운 풀 내음이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강물 표면에 반사된 햇빛은 눈부시게 반짝였고, 살짝 이는 바람에 물결이 일 때마다 그 빛은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졌다 다시 합쳐졌다. 아마 여름이었을 것이다.

발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물살의 감촉이 선명했다. 놀랄 만큼 차가워서 순간 숨을 멈췄던 기억. 발을 담근 부분과 물 밖의 공기에 노출된 부분의 온도 차이가 뚜렷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갈의 울퉁불퉁함, 둥글거나 혹은 살짝 날카로운 모서리가 발바닥을 자극했다. 때로는 부드러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느낌. 그 간지러움과 함께 물의 저항감이 느껴졌다.

손바닥 안에 쥐었던 조약돌 하나가 떠올랐다. 햇볕에 달궈져 따뜻하면서도 물기 때문에 서늘한, 그 이중적인 감촉. 표면은 놀랍도록 매끄러웠고,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희미한 물 자국이 남았다. 그 돌의 무게감이 손바닥에 묵직하게 느껴졌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 물이 빠르게 흘러가며 자갈과 부딪히는 소리, 졸졸졸, 때로는 차르르 하고 부서지는 소리. 바람이 강둑의 풀과 나뭇잎을 스치며 내는 속삭임, 사사삭, 하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 그리고… 그래, 웃음소리. 맑고 높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울려 퍼지던 소녀의 웃음소리. 그 소리는 마치 강물처럼 투명하게 공간을 채웠다.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따스했던 햇살의 감각. 그것은 다른 날의 기억 속의 빛으로 스르르 이어졌다. 공원이었을까. 하늘 높이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땅 위에서 춤을 추었다. 초록색 잎맥을 투과한 빛은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눈을 감으면 그 연둣빛이 눈꺼풀 위에서 부드럽게 일렁였다. 공기 중에는 잘 깎인 잔디의 풋풋한 냄새와 따뜻하게 데워진 흙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폐부 깊숙이 그 향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아마 늦은 오후였을 것이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나무로 된 벤치의 표면은 햇볕을 받아 따뜻했고, 손바닥으로 만지면 살짝 거친 나무의 결이 느껴졌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곳도 있었을까. 그 마찰감이 손바닥에 선명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시야 가득 들어오는 나뭇잎들의 흔들림.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깊었다. 아주 천천히, 솜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귓가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이 낮게 깔려 있었고, 마치 배경음악 같았다. 자동차 경적 소리, 희미한 사이렌 소리. 간간이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전거 벨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 바람이 불어와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는 달콤한 꽃향기가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이 나른하고 평온했다. 그래, 평온했다.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공원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딘가 텅 빈 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공백감은 전혀 다른 공간의 기억을 불러왔다. 높고 넓은 건물 안. 아마 박물관이나 미술관이었을 것이다. 천장이 너무 높아서 목이 아플 정도였고,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아치형 구조물이 사라져 갔다. 넓은 홀에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고, 그 광활함이 오히려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 바닥 위를 걷는 내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그 울림은 메아리가 되어 공간을 맴돌다 희미해졌다. 마치 소리가 벽에 흡수되는 듯했다.

그 조명 아래 대리석 바닥은 희미한 광택을 띠고 있었고, 흑백의 정교한 패턴이 끝없이 이어졌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그 빛과 패턴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공기는 무겁고 서늘했으며, 아주 희미하게 오래된 먼지 냄새와 어쩌면 마룻바닥 광택제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코를 찌르는 화학적인 냄새. 주변은 너무나 조용해서 내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듯했고, 간혹 멀리서 알 수 없는 기계음 같은 것이 낮게 울렸다. 웅웅거리는 소리, 마치 건물이 숨 쉬는 소리 같았다.

벽에는 거대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거나, 유리 진열장 안에 유물들이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림 속 인물들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오는 듯한 착각. 진열장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왜소하고 흐릿했다. 그 내용물보다는, 그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 거대한 공간 속의 작은 점처럼 느껴지던 그 감각만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복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이 낯선 공간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대리석의 차갑고 단단한 감촉.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소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방 안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불규칙하게 경련하듯 깜빡였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피부의 온도는 익숙했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 했지만, 어둠과 빗줄기 때문에 흐릿한 실루엣만이 보일 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불분명한 형체만이 그곳에 있었다.

그때,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캄캄한 어둠. 빛 한 점 없는, 눈을 떠도 감은 듯한 절대적인 암흑이었다.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숨 막히게 두터운 어둠.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으며, 마치 차가운 물속에 잠긴 듯 폐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방 안 어딘가에서, 아주 짧고 날카롭게, 짜악,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 직후,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큰 소리가 아니었다. 고통과 공포가 응축되어 날카롭게 분출되는, 금속성의 울림을 가진 소리였다. 한번 시작되자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물리적인 충격처럼 몸을 관통하는 듯했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자, 귀가 먹먹할 정도의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에서, 어둠 자체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과 천장, 바닥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잉크가 물에 퍼지듯 부드럽게, 혹은 검은 천이 너울거리듯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이었다. 형태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거리며 공간을 잠식해 들어왔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오직 움직임만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마치 심연 자체가 손을 뻗어 오는 듯한 감각.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피부 위로 소름이 돋고, 심장은 가슴을 부수고 튀어나올 듯 격렬하게 뛰었다. 그림자들은 소리 없이 다가왔고, 그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에는 듯했고, 손발 끝부터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몸이 얼어붙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그 유려하면서도 위협적인 그림자의 춤과, 귓가에 각인된 비명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 감각 없이, 그저 얼어붙은 채, 그 절대적인 공포 속에 온전히 잠겨 있었다.

소라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어쩌면 다시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방금 지나간 기억의 감각들이 사라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던 그 소리는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가늘고 예리하게 공간을 가르는 형광색의 선처럼, 혹은 깨진 유리 조각의 날카로운 단면처럼, 어둠 속에서 번쩍이며 진동했다. 그 선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신경을 긁었다.

꿈틀거리던 그림자는 짙고 깊은 검은색으로, 때로는 점성이 있는 기름처럼 번들거리며 흘러내리고, 때로는 벨벳처럼 부드럽게 너울거리며 시야를 잠식했다. 그 검은색은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고, 그 안에서 더 깊은 어둠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느렸지만 멈추지 않았고,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며 예측할 수 없는 패턴으로 공간을 채워나갔다. 만져본다면 차갑고 미끄러울 것 같은 감촉.

온몸을 얼어붙게 했던 공포의 한기는 푸른빛이 감도는 날카로운 얼음 결정의 형태로, 혹은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질감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피부에 와 닿는 듯 차갑고, 날카로운 모서리는 위협적이었다. 마치 수많은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듯한 감각. 이 감각들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형광색의 날카로운 선 위로 검은 그림자가 흘러내려 그것을 감싸 안았고, 차가운 얼음 결정의 질감 속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더욱 깊어졌다. 눈앞에, 혹은 마음속에, 부서진 소리와 춤추는 어둠과 얼어붙은 공포가 뒤섞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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