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온의 메아리 (Neon Echoes) Act 3: 기억의 회랑 (Corridor of Memory)
네온의 메아리 (Neon Echoes)
Act 3: 기억의 회랑 (Corridor of Memory)
비였다, 아니, 네온이었다, 혹은 뇌 속에서 끓어오르는 데이터의 잔재일 뿐이었나, 어둠을 적시며 플로팅 슬럼의 위태로운 통로 위로 쏟아지는 것은. 윤서는 비틀거리며 발을 디뎠다. 발밑의 녹슨 철판이 삐걱거렸다, 마치 오래전 여름, 그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삐걱대던 어린 시절 공원의 그네처럼. 그러나 그 소리는 이내 클럽 ‘크롬 엘리시움’의 맥동하는 베이스 음향으로 변모했다가, 다시 사무실 에어컨의 단조로운 소음으로 잦아들었다. 공기는 썩은 하수구 냄새와 타버린 회로의 매캐함, 젖은 부패물의 역한 기운으로 질척거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이 공기의 무게는 어제 책상 앞에서 마셨던 식어 빠진 커피의 그것과 닮았는지, 아니면 클럽에서 들이켰던 달콤한 합성 마약의 연기였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재킷 안쪽에 꽂힌 세라믹 검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반투명한 칼날에는 희미한 네온 빛이 감돌았다. 그 무게감은 낯설면서도 기묘하게 익숙했다. 그것은 미나의 손길이었나, 클럽 VIP 룸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섬세하고도 위험한 그 손길? 아니면, 아주 오래전, 희미한 기억 속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었을까, 작은 그녀의 손을 잡고 걷던 그 느낌? 검날은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그녀의 웃음소리처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아니, 이건 사무실 서버실의 저주파 소음일 뿐인가? 머릿속이 온통 부서진 거울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네온의 맥동하는 빛줄기, 그것은 어머니가 부르던 자장가의 선율 같기도 했고, 동시에 그녀, 미나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던 디지털 불꽃 같기도 했다.
양철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날카로웠다. 한 방울 한 방울이 피부에 와 닿을 때마다, 그것은 사무실의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를 연상시켰다가, 문득 귓가에 울리는 미나의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계속 와, 재밌잖아. 그 목소리가 정말 그녀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클럽에서 약 기운에 들었던 환청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벽에는 AR 그래피티가 살아 움직였다. 꿈틀거리는 덩굴 식물, 섬뜩한 해골 문양, 그리고 익숙한 기업 로고. 그것들은 미나의 피부 위에서 춤추던 홀로그램 문양처럼 변덕스럽게 깜빡였고, 또 동시에 사무실 컴퓨터의 단조로운 스크린세이버 이미지로 겹쳐 보였다가, 문득 어린 시절 방에 붙어 있던 꽃무늬 벽지의 잔상으로 아른거렸다. 그래피티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녀의 피부처럼. 비가 얼굴을 적셨다. 이것은 그녀의 눈물인가?
한쪽 구석, 녹슨 홀로그램 스크린이 지지직거리며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화면 위로 하얀 토끼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하얀 토끼는 분명 미나의 장난기 어린 미소로 변했다가, 어느새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로 바뀌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 임플란트 속 피 묻은 손의 이미지로 일그러졌다. 눈이 타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 때문인가, 아니면 저 기업 로고의 섬광 때문인가? 검이 손안에서 떨렸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손인가?
반쯤 기계화된 얼굴을 한 빈민가 주민이 그녀를 거칠게 밀치고 지나갔다. “꺼져, 약쟁이!” 그 목소리는 팀장의 날 선 질책과 겹쳐 들렸고, 동시에 기억 속 어떤 해커의 필사적인 절규처럼 메아리쳤으며, 클럽의 날카로운 전자음 속으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던 윤서는 또 다른 통로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더 깊고 어두웠다. 현실과 기억이 뒤섞인 미로였다.
여기는 어디인가. 플로팅 슬럼의 뒷골목인가, 아니면 그녀 정신의 복도인가. 벽에서는 부서진 전선 가닥들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네온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기이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재킷 속의 검은 여전히 묵직했다. 그 희미한 빛은 미나의 웃음소리 같기도 했고,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 같기도 했다. 벽면을 스치는 AR 유령들. 미나의 매혹적인 미소, 어머니의 근심 어린 얼굴, 그리고 임플란트 속 해커의 피범벅이 된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클럽의 레이저 광선처럼, 어린 시절 앨범 속 사진처럼, 기업 기밀을 훔치다 발각된 순간처럼. 그녀의 미소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아니,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나? 검이 다시 진동했다. 저것은 기업 로고의 섬광인가?
공기는 곰팡내와 오존 냄새로 가득했다. 사무실 서버실의 공기, 클럽의 인공적인 재스민 향기가 뒤섞인 듯한. 발밑에서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버석거렸다. 그 소리는 그녀를 비에 젖은 어린 시절의 거리로 데려갔다. 어머니의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곳은 데이터 스트림이 벽면을 타고 흐르는 서버 저장고로 변해 있었다. 미나의 문신처럼 데이터가 맥동했다.
홀로그램 노점상이 나타나 싸구려 기억 상품을 외쳤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세요! 짜릿한 경험을 팝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무실 동료들의 수다와 겹쳐 들렸고, 정보를 팔아넘기려던 어떤 해커의 절박한 목소리 같기도 했으며, 클럽의 기계적인 비트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목소리는 검의 노랫소리인가? 그녀의 웃음소리가 타는 듯하다. 네온 빛인가? 부서진 비디오 스크린 위로 하얀 토끼 신호가 다시 깜빡였다. 토끼는 어린 시절 그녀가 그렸던 서툰 그림으로 변했다가, 다시 차가운 기업 로고로 굳어졌다. 임플란트 기억 속 섬광처럼.
달려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복도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었다. 임플란트 속 전투 현장,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쏟아버린 커피처럼 검붉었다. 다음 순간, 그곳은 그녀의 사무실 칸막이였다. 서류들이 재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이 피는 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잉크 자국인가? 다리는 움직이지만, 이것은 누구의 전쟁인가? 의식은 혼돈의 강물처럼 흘렀다. 개인적인 기억들 – 어머니의 자장가, 학창 시절의 주먹다짐 – 과 최근의 혼란 – 클럽의 베이스, 미나의 손길 – 그리고 임플란트 파편들 – 격투, 배신, 기업 로고 – 이 모든 것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 없이 뒤섞여 흘렀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 문장들처럼, 의식은 끊임없이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넘나들며 파편화된 감각의 콜라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심어진 기억인지, 혹은 잊었던 과거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윤서는 부유했다. 그녀의 자아는 희미해지고, 오직 본능적인 생존 욕구와 미나를 향한 불가해한 끌림만이 남아 그녀를 이끌었다. 하얀 토끼는 여전히 저 앞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쫓아야 했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래야만 했다.
복도는, 그래, 복도였다, 그러나 어떤 복도였는지, 기억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부서져 내렸다. 플로팅 슬럼의 축축하고 뒤틀린 통로였는가, 아니면 그녀 자신의 정신 깊숙한 곳, 잊힌 기억들이 떠도는 어두운 회랑이었는가. 현실과 기억은 이제 뒤엉켜 흐르는 강물처럼 분간할 수 없었다. 벽에서는 끊어진 전선 가닥들이 신경다발처럼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네온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며 공간 자체를 안개처럼 희뿌옇게 만들었다.
재킷 속의 세라믹 검은 이제 그녀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 차가운 무게와 희미한 빛은 미나의 웃음소리처럼, 혹은 사무실 서버실의 낮고 끊임없는 웅얼거림처럼 익숙하게 다가왔다. 벽면은 살아있는 스크린처럼 끊임없이 이미지를 투사했다. AR 유령들. 미나의 조롱하는 듯한 미소,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썹, 그리고 임플란트된 기억 속 해커의 피 묻은 얼굴이 차례로 명멸했다. 클럽의 레이저 광선처럼 눈부시게, 어린 시절 낡은 사진처럼 희미하게, 기업 데이터를 빼돌리던 순간처럼 긴박하게. 그녀의 미소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베어왔다. 아니,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졌나? 검이 다시 미세하게 진동했다. 저 기업 로고의 차가운 빛 때문인가?
공기 중에는 곰팡내와 오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사무실 서버실에서 풍겨 나오던 먼지 쌓인 기계 냄새, 클럽 VIP 룸을 감돌던 인공적인 재스민 향기,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 윤서는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버석거리는 콘크리트 조각 소리가 그녀를 또 다른 시간 속으로 밀어 넣었다. 비에 젖은 어린 시절의 거리. 물웅덩이를 첨벙거리며 뛰어가던 작은 소녀. 어머니의 나지막한 콧노래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차갑고 금속적인 공간에 서 있었다. 데이터 스트림이 푸른 폭포수처럼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서버 저장고. 그 흐름은 미나의 피부 위에서 춤추던 AR 문신처럼 현란하고 위태로웠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세요! 짜릿한 경험을 팝니다!” 홀로그램 노점상의 외침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사무실 동료들의 시시콜콜한 뒷담화와 겹쳐 들렸고, 정보를 팔아넘기려 필사적이던 어떤 해커의 갈라진 목소리 같기도 했으며, 클럽의 기계적인 비트 속으로 맥없이 스며들었다. 저 목소리는 검의 노래인가? 그녀의 웃음소리가 타는 듯하다. 네온 빛인가? 부서진 비디오 스크린 위로 하얀 토끼 신호가 다시 격렬하게 깜빡였다. 토끼 형상은 순식간에 어린 시절 그녀가 벽에 낙서했던 서툰 토끼 그림으로 변했다가, 차갑고 위압적인 기업 로고로 굳어졌다. 임플란트 기억 속 섬광처럼, 뇌리를 파고드는 차가운 빛.
달려야 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달려야 했다. 복도는 끊임없이 공간을 뒤틀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임플란트가 보여주는 가상의 전투 현장. 바닥에 흥건한 검붉은 피는 마치 사무실 탕비실에 쏟아버린 싸구려 커피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그곳은 그녀의 비좁은 사무실 칸막이였다. 결재 서류들이 재처럼 힘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바닥의 저것은 피인가, 아니면 그저 잉크 자국인가? 다리는 필사적으로 움직이지만, 이것은 누구의 전쟁인가?
의식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격류가 되어 흘렀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던 아늑한 요람 속에서, 그녀는 동시에 피 튀기는 임플란트 속 전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와 주먹다짐을 하던 운동장의 흙먼지 냄새는 클럽의 강렬한 베이스 음향과 뒤섞였고, 미나의 불가사의한 손길은 낯선 해커의 배신당한 눈빛과 포개졌다. 모든 감각이 뒤엉키고, 모든 기억이 현재를 침범했다. 윤서라는 존재는 이제 수많은 파편으로 흩어져 시간의 복도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잃었다. 현실이라는 닻은 끊어졌고, 기억이라는 나침반은 고장 났다. 오직 검의 차가운 감촉과 하얀 토끼의 깜빡이는 신호만이 그녀를 이 혼돈 속에서 붙잡아 매는 유일한 끈이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 복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미나가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기억의 파편, 또 다른 혼돈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달려야 했다. 하얀 토끼를 향해, 미지의 심연 속으로.
어둠 속에서, 그래, 어둠이었다, 혹은 눈꺼풀 뒤에서 깜빡이는 네온의 잔상이었을까, 그들이 다가왔다. 복도는 이제 숨 막힐 듯 좁아졌고, 벽은 축축한 콘크리트의 질감을 잃고 그저 빛과 그림자의 경계선처럼 희미하게 떨렸다. 사무실의 비상등처럼, 아니, 클럽의 조명처럼 번뜩이는 붉은 스캐너 눈빛들.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빗물 고인 웅덩이를 밟는 소리 같기도 했고, 팀장의 구둣발 소리 같기도 했으며, 심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북소리 같기도 했다. 그들의 침묵은 질책보다 더 차갑고 무거웠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재킷 안쪽,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미나의 선물. 검을 뽑아 들자 반투명한 칼날이 주위의 희미한 빛을 모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녀의 문신처럼, 그녀의 속삭임처럼. 검이 손에 익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이것이 내 손인지 아니면 검 자체가 의지를 가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네온 빛과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 섬광.
에이전트 하나의 바이저가 깨져나갔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어머니였다. 자장가를 부르던, 그 온화한 얼굴. 아니, 아니었다. 다음 순간 그것은 피투성이 해커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임플란트 속에서 보았던, 배신당하고 죽어가던 그 얼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러나 동시에 검은 차갑게 베어 들어갔다. 왜? 이 목소리는 위안인데, 왜 손은 파괴를 행하는가? 이것은 누구의 손인가?
싸움은 이제 현실의 시공간을 벗어난 듯했다. 장면들이 끊임없이 중첩되고 뒤섞였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복도인가, 아니면 고층 빌딩의 차가운 회의실인가. 눈앞의 에이전트는 순식간에 팀장으로 변해 있었다. 넥타이를 맨, 늘 불만스럽던 그 얼굴. 검이 그의 넥타이를 갈랐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 “넌 해고야!” 그 소리는 갑자기 어떤 해커의 절박한 외침으로 변했다. 시스템 코드를 해독하며 외치던, 살려달라는 비명. 그의 비명은 그녀의 웃음소리인가? 아니면 네온의 날카로운 파열음인가? 바닥에 고인 것은 붉은 피인가, 아니면 쏟아진 커피 자국인가?
매 순간이 감각의 폭풍이었다. 검의 진동, 피부를 에는 빗줄기의 차가움, 공기 중의 녹슨 쇠 냄새, 그리고… 익숙한 무게감. 사무실에서 쓰던 싸구려 볼펜의 무게. 임플란트 속 해커가 마지막 일격을 날리던 순간의 그 무게감.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감각으로 흘러들었다.
구석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던 빈민가 고물상이 소리쳤다. “저주받은 년! 칼에 미쳤군!” 그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꾸짖음처럼 귓가를 때렸고, 동시에 시스템 침입을 경고하던 어떤 해커의 목소리처럼 불안하게 울렸으며, 클럽의 기계적인 소음 속으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저 저주는 검의 노래인가? 그녀의 눈빛이 타는 듯하다. 저 기업 로고 때문인가? 머리 위를 떠다니던 드론의 작은 화면에 하얀 토끼 신호가 깜빡였다.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가라는 손짓처럼. 그 빛은 유혹적이었고, 동시에 위험했다. 미나의 눈빛처럼.
의식은 이제 걷잡을 수 없었다. 빈민가 통로의 삐걱거림, 미나의 인공적인 재스민 향기, 사무실의 답답한 형광등 불빛, 그리고 검의 친밀한 진동.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되어 짜이고 있었다. 시간도, 공간도, 자아도 그 속에서 녹아내렸다. ‘나’라는 경계는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누구인가. 사무실 직원 윤서인가? 클럽에서 미나에게 매혹되었던 여자인가? 아니면 이름 모를 해커의 기억을 뒤집어쓴 꼭두각시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이름 붙일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인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비명인가, 아니면 그녀의 속삭임인가? 검이 다시 진동했다. 이것은 누구의 피인가?
에이전트들이 쓰러져 갔다. 기계 부품처럼, 의미 없이.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복도는 끝이 없었다. 기억의 회랑은 무한히 이어지는 듯했다. 하얀 토끼는 여전히 저 앞에서 깜빡이며 손짓하고 있었다. 가야 했다. 이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실 가닥. 그 끝에 무엇이 있든, 가야만 했다. 자아는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움직여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몸을 이끌었다. 검을 쥔 손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이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 유일하게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 미나의 의지, 그녀의 메아리일 뿐인지도.
좁아지던 복도는, 그래, 복도라고 부를 수 있었다면,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벽도, 천장도, 바닥도 사라지고 오직 소용돌이치는 데이터의 흐름만이 남았다. 이곳은 어디인가. 정신의 내부인가, 아니면 네트워크의 심연인가. 플로팅 슬럼의 네온 빛은 이제 추상적인 맥동으로 변해 허공을 채웠고, 공기는 사무실 서버실의 오존 냄새와 클럽의 정전기 같은 미묘한 진동으로 가득 찼다. 이것은 실재하는 공간인가, 아니면 임플란트가 만들어낸 환상인가.
홀로그램 패널들이 사방에서 명멸했다. 미나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밌지 않아? 그 웃음소리는 어머니의 흐느낌으로 변했다가, 임플란트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어떤 격투 장면의 날카로운 금속음으로 바뀌었다. 그 웃음은 나의 집인가? 그런데 왜 피 냄새가 나는 거지? 기억의 파편들이 데이터 스트림을 타고 흘러 다녔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처럼.
재킷 속의 검은 여전히 무겁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공허 속에서 유일하게 만져지는 실체. 반투명한 칼날은 주위의 네온 빛을 흡수하며 희미하게 빛났다. 미나의 눈동자처럼. 그것의 손잡이는 익숙한 감촉을 주었다. 그녀의 속삭임처럼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공원에 서 있었다. 낡은 그네가 끼익거리며 흔들렸다. 사무실의 고장 난 에어컨 소리처럼 단조롭게. 아니, 다음 순간 나는 차가운 서버 저장고 안에 있었다. 데이터가 미나의 문신처럼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네가 흔들리는 건가, 아니면 클럽의 베이스가 아직도 내 몸속에서 울리는 건가? 검의 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이것은 그녀의 손길인가?
거대한 기업 로고가 눈앞에 나타났다. 임플란트 속에서 보았던, ‘순응 알고리즘’이라는 이름표를 단 그것. 사무실 마감일처럼 숨 막히는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정신을 옭아매려는 듯한.
다시 누군가가 나타났다. 에이전트인가? 아니면 넥타이를 맨 팀장인가? 아니, 어쩌면 어린 시절 나를 괴롭히던 골목대장인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검을 뽑아 들었다. 미나의 선물. 그 칼날이 네온 빛과 기억의 파편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이것은 사무실에서 쓰던 싸구려 볼펜의 무게인가, 아니면 임플란트 속 해커가 마지막 일격을 날리던 순간의 그 무게인가? 검이 허공을 갈랐다. 네온 빛을 베고, 기억을 베고, 정체 모를 적을 베었다. 이 칼날은 자유를 주는가? 그런데 누구의 사슬을 끊는 것인가?
싸움은 현실감을 상실한 채 이어졌다. 이곳은 어디인가. 학창 시절, 주먹다짐을 하던 학교 운동장인가. 손에 묻은 것은 흙먼지인가, 아니면 피인가. 아니, 이곳은 서버실인가. 해킹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시스템을 파괴하던 그 순간인가.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사무실의 고장 난 복사기처럼, 위태로운 불꽃을 튀기며. 저 불꽃은 타는 듯하다. 그녀의 시선인가? 내 손은 움직이지만, 이것은 누구의 의지인가?
검의 진동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것만이 이 혼돈 속에서 나를 붙잡아 주는 닻이었다. 칼날의 희미한 빛은 미나의 문신과 겹쳐 보였고, 어머니의 눈물과 뒤섞였으며, 이름 모를 해커의 핏자국 위로 번져나갔다. ‘나’라는 존재는 이제 완전히 해체되어 데이터 스트림 속을 부유하는 파편에 불과했다. 윤서, 해커, 어린 소녀, 직장인…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의미 없는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부서진 모니터 화면 위로 하얀 토끼 신호가 다시 나타났다.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더 강렬하게. 그것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강. 강변으로 가야 한다는 메시지. 혼돈 속에서 들려오는 유일한 명령.
의식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공허의 웅얼거림, 미나의 속삭임, 계속 와, 어머니의 자장가, 그리고 검의 친밀한 진동만이 전부였다. 네온 빛이 눈을 멀게 하는가, 아니면 그녀의 눈빛인가? 검이 다시 진동했다. 이것은 누구의 피인가? 이 디지털 공허의 초현실적인 무게감 속에서, 나는 완전히 녹아내렸다. 남은 것은 오직 검과, 하얀 토끼뿐. 그곳으로 가야 했다. 강변으로.
발걸음이, 그래, 발걸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무언가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먼지인가, 부서진 유리 조각인가, 아니면 흩어진 기억의 파편인가. 디지털 공허는 어느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녹슨 철골 구조물이 뼈대처럼 드러나고, 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거친 숨을 내쉬는 듯했다. 버려진 창고. 바람이 틈새로 스며들며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 같기도 했고, 사무실 서버실의 단조로운 기계음 같기도 했으며, 오래전 어머니가 귓가에 속삭이던 자장가처럼 아련하게 울렸다. 공기는 곰팡내와 오존, 그리고 깊숙이 스며든 녹의 퀴퀴한 냄새로 질척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이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벽면은 여전히 살아있는 스크린처럼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AR 유령들. 미나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 어머니의 근심 어린 찡그림, 피 묻은 해커의 공허한 눈동자가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클럽의 레이저 광선처럼 어지럽게 명멸하다가, 어린 시절 앨범 속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발밑의 파편들은 밟힐 때마다 다른 소리를 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의 깨진 유리 조각 소리처럼 날카롭게, 임플란트 속 전투 현장의 부서진 금속 파편 소리처럼 둔탁하게, 사무실 스캐너가 서류를 삼키는 소리처럼 신경질적으로. 이곳은 어디인가. 폐허가 된 창고인가, 아니면 산산조각 난 기억의 무덤인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살갗을 베는 듯 따끔거렸다. 아니, 이것은 그녀의 손길인가? 온몸이 후들거렸다. 이것은 누구의 전쟁인가?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에이전트들. 붉은 스캐너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들의 칼날은 클럽의 네온 빛처럼 차갑게 빛났고, 그들의 침묵은 팀장의 냉담한 시선처럼 공간을 얼어붙게 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제는 반사적인 동작. 재킷 안쪽,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미나의 선물. 검을 뽑아 들자 반투명한 칼날이 창고의 희미한 빛을 모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녀의 문신처럼, 그녀의 속삭임처럼. 검이 손에 익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이것이 내 손인지 아니면 검 자체가 의지를 가진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손잡이의 감촉은 이제 분리할 수 없는 몸의 일부였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네온 빛과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 섬광,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혼돈.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머리 위를 날던 드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다음 순간, 손에 들린 것은 검이 아니라 사무실 보고서 뭉치였다.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웃는 듯한 그 표정. 보고서를 찢어발겼다. 아니, 검이 드론을 베어 가르고 있었다. 불꽃이 튀었다. 또 다른 에이전트의 목을 향해 검이 날아갔다. 그러나 베인 것은 목이 아니었다. 임플란트 속에서 본 적 없는 어떤 낯선 이의 목이었다. 붉은 피가 튀었다. 아니, 이것은 쏟아진 잉크 자국일 뿐인가? 모든 것이 뒤섞이고 있었다. 행동과 기억, 현실과 환상이 뒤엉켜 하나의 기이한 춤을 추는 듯했다.
의식은 이제 완전히 조각나 흩어지고 있었다. ‘나’라는 중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직 파편화된 감각과 기억의 파편들만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불꽃을 일으킬 뿐이었다. 사무실 책상의 차가운 표면, 클럽의 뜨거운 공기,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 해커의 차가운 분노, 미나의 뜨거운 입술… 모든 것이 한데 엉겨 붙어 무엇 하나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창고 구석에서 기계 부품을 뒤적이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헬멧을 쓴, 얼굴을 알 수 없는 약탈자였다. “젠장, 고철뿐이군.” 그 목소리는 사무실 동료들의 불평과 겹쳐 들렸고, 데이터를 훔치려다 실패한 해커의 절망적인 탄식처럼 느껴졌으며, 텅 빈 창고 안에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저 목소리는 검의 노래인가? 그녀의 웃음소리가 타는 듯하다. 네온 빛인가? 약탈자는 윤서를 흘끗 보더니, 중얼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얀 토끼 신호가 다시 나타났다. 부서진 모니터 화면 위에서 격렬하게 깜빡이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한강. 강변으로 가야 한다는 차갑고 명료한 지시.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마치 나방이 불빛에 끌리듯, 그 신호를 향해 움직여야만 했다.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에이전트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숨결은 거칠었고, 시야는 흐릿했다. 검을 쥔 손만이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 희미한 빛은 미나의 미소 같기도 했고, 어머니의 눈물 같기도 했으며, 임플란트 속 기업 로고의 차가운 섬광 같기도 했다. 손안의 검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존재의 증거, 혹은 그녀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표식이었다.
마침내 창고 벽의 부서진 틈새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강변이었다. 하얀 토끼가 이끄는 곳.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곳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창고의 먼지, 미나의 재스민 향기, 어머니의 자장가, 그리고 검의 친밀한 진동… 모든 감각이 뒤섞여 마지막 불꽃처럼 타올랐다.
네온 빛이 눈을 멀게 하는가, 아니면 그녀의 눈빛인가? 검이 다시 진동했다. 이것은 누구의 피인가?
강변의 축축한 흙 위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진흙이 옷 속으로 스며드는 감각. 하늘에서는 네온과 별빛이 뒤섞여 어지러운 무늬를 그렸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기름띠처럼 번들거리며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이 보였다.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창고 안의 소음도, 에이전트들의 추격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수많은 목소리들도 이제는 희미한 배경 소음일 뿐.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듯했다. 오직 눈만이 저 멀리 강물 위에서 깜빡이는 하얀 토끼 신호를 쫓고 있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다른 모든 것은 의미를 잃고 흩어져 갔다. 책상, 커피, 보고서, 어머니의 얼굴, 클럽의 음악, 해커의 코드…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풍경처럼. 이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기억도, 어떤 감정도. 텅 빈 느낌.
아니, 단 하나. 손안에 쥔 검의 미세한 진동. 그것은 마치 그녀의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혹은 그녀의 속삭임처럼. 검날에 반사되는 네온 빛은 그녀의 눈동자 같았다. 강물의 차가운 흐름은 그녀의 손길 같았다. 모든 감각이 오직 한 점으로 수렴하는 듯했다. 그녀. 미나.
하얀 토끼 신호가 마지막으로 강렬하게 빛났다 꺼졌다. 그 잔상이 망막에 남아 어른거렸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텅 빈 내부에서 남은 마지막 무언가가, 그 빛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에게로. 오직 그녀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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